단풍은 한복의 빛깔처럼 은은하다.

△패션: 문화의 정면

패션은 아주 미묘하며 미세한 차이 속에서 탄생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에서 앤 해서웨이가 입은 스웨터의 색은 푸른색이지만, 정확히는 ‘세룰리안 블루’다. 푸른색만 해도 수백 가지에 이른다. 여기에서 세룰리안이라는 수식어가 왜 블루 앞에 붙은 것일까? 그것은 수백 가지의 다른 블루와 구별하기 위해서다. 즉 세룰리안 블루는 푸른색의 한 부분이다.

푸른색이 이렇게 많다 보니 특정한 옷에 어떤 색이 더 나은지를 고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훌륭한 디자이너는 가장 잘 어울리는 색을 골라내고야 만다. 그것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할 수 있는 이유는 고객이 그것을 알아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자신만의 미적 가치를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이 원하는 디자인을 찾아서 그것을 실제 제품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디자이너의 안목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곧 대중의 안목이며, 그 사회와 문화의 안목이다. 유명한 디자이너란 대중의 감각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며, 학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의 감각을 하나하나 습득한 사람일 것이다.

더 정확히는 한 사람의 디자이너가 가진 탁월한 안목과 감각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디자이너가 속한 사회의 문화적 수준이 만들어놓은 결과물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패션이나 디자인은 단지 옷의 모양, 색감, 질감을 고르는 차원이라고 할 수 없다. 패션은 그 사람의 경험 전체, 나아가 그 사람이 발 딛고 있는 땅의 문화 전체가 녹아들 때 비로소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패션의류산업이 기술적으로 선진국에 뒤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패션을 선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이와 관련이 깊다.

그렇다면 이제 분명해진다. ‘우리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세계 수준의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정책’은 불가능하다. 그런 정책을 펼치는 것보다 우리나라를 세계인이 호감을 갖는 나라로 만드는 것이 더 빠를 수 있다. 세계인이 호감을 갖는 나라란 쿠웨이트와 같이 국민소득 수준만 높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뛰어난 국가경영능력과 위기 대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나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국가안전을 보장하고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나라, 소득수준이 높으며 그에 비견되는 사회 문화수준을 가지고 있는 나라다. 그리하여 세계의 많은 사람이 살고 싶어 하는 나라, 결국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선진국일 것이다.

△국가브랜드가치

한 나라의 인지도를 결정하는 호감도, 신뢰도 등 유·무형의 가치를 총합하여 수치화한 것을 국가브랜드지수 혹은 국가브랜드이미지라고 한다.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한 동안 각국의 브랜드이미지를 조사한 적이 있다. 조사의 내용은 이렇다. 여러 나라가 동일한 제품을 만들었고, 그 소비자 가격이 100달러로 동일하다고 했을 때 얼마를 주고 이 물건을 살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2012년의 경우 미국, 독일, 일본 등 주요 선진국의 경우 소비자 가격인 100달러를 주고 사겠다고 세계인은 응답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20% 이상을 할인한 76.6달러에 사겠다고 했다. 2006년에는 66.3달러였던데 비해서 15.5% 상승했지만, 여전히 한국 제품은 다른 나라들보다 저평가받고 있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우리의 한복을 생각해보자. 한복은 아름답고 우아하다. 하지만 한복에 대해서 세계인은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2015년에 열린 ‘샤넬2015/16 크루즈 컬렉션’에서 한복은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샤넬 크루즈 컬렉션’ 쇼는 2000년부터 매년 열려 왔다. 휴양지 옷차림과 간절기 패션을 선보이며 이듬해 봄·여름 패션 트렌드를 미리 점쳐볼 수 있어서 세계 패션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이 쇼는 파리, 로스앤젤레스, 베니스, 베르사이유 등의 도시를 돌았고, 아시아에서는 싱가포르, 두바이를 거쳐 한국에서 세 번째로 열렸다.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가 직접 참여한 이 패션쇼에 300명이 넘는 기자가 초대되었다. 라거펠트는 한복의 전통미와 서구적 세련미를 접목시켜 이제까지와는 다른 한복을 탄생시켰다.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한복은 우리 것인데도 불구하고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같은 외국 유명 디자이너를 통해서 소개되어야 비로소 세계인의 관심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브랜드가치는 이 정도 수준이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 라거펠트가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고, 한국의 전통 옷을 대상으로 디자인했다는 것, 그것이 곧 한국의 브랜드가치가 향상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기관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집중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를 선진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이다. 경제적 수준이나 군사적 수준과 같은 하드파워 뿐 아니라 문화나 사회제도, 국민의식과 같은 소프트파워도 함께 갖추어야 할 것이다. 경제적 부와 국민의 안정을 보장할 수 있는 군사력이 갖춰지는 것은 물론 높은 문화수준을 바탕으로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킬 때 세계인은 대한민국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문화를 모방하고, 우리나라에서 살고 싶어할 때 우리나라가 세계인의 가슴속에 새겨질 것이다. 여기에서 세계인을 끌어올 수 있는 그런 창조적 문화의 힘이 생성될 것이고, 그때 우리나라의 패션이 세계를 리드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