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필이라는 조선 중기 때 문인이 있어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을 자유분방하게 살았다. 나는 그를 한문소설 ‘주생전’의 작가로 먼저 알았다.

박희병 선생 등의 논의에 따르면 16,17세기에 한문 단편소설의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대규모 전쟁이 삶의 변화를, 그리고 연이어 소설의 변화를 야기한 탓이다.

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그는 광해군 때 자신이 쓴 시가 문제가 되어 해남 땅으로 귀양 떠나던 중에 길가의 사람들이 건네주는 술을 너무 마셔 이튿날 그만 세상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과연 일세의 풍류객이었듯한데, 그가 남긴 석주집의 글들 가운데 하나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이 ‘창맹설(倉氓說)’이라는 글은 관가 창고 옆에 살던 도둑의 이야기다.

옛날에 관가 옆에 사는 한 백성이 있었는데 장사도 하지 않고 농사도 짓지 않는데 집에 돌아올 때마다 늘 쌀을 가져 왔다. 덕분에 식구들이 굶지 않았지만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게 되자 아들을 불러 은밀히 알려 주었다. 관가 창고 몇 번째인가 기둥에 손가락 하나만한 구멍이 있는데, 나뭇가지로 살살 긁어내면 쌀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 다섯 되 이상은 빼내지 말라 했다.

아들은 처음에는 아버지의 말을 따랐지만 점차 욕심이 생겼다. 쌀을 더 많이 얻어내고 싶은 나머지 나무기둥의 구멍을 넓히니 마침내 감시하는 눈에 띄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석주 권필은 선조, 광해군 조를 살다간 인물이니 전쟁과 정쟁으로 얼룩져 있어 나라의 어지러움이 한도를 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조선시대가 당파싸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어느나라나 피비린내 나는 내부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오늘날 우리 사회도 어지러움이 극에 달하기는 마찬가지인 상황에 나랏도적도 아래위로 적지 않은 듯하다.

생각하기를, 작은 허물은 누구나 있으되 크게 눈에 띄지 않는다면 그래도 무사할 수 있겠다. 과욕은 그러나 큰 화를 부르는 법, 옛 사람 권필이 일찍이 이를 알아 스스로는 벼슬에 나가지도 않았으면서 벼슬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여 주었다.

세상 삶의 큰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같다. 그리고 어찌 벼슬살이하는 사람들 뿐이랴. 분수를 알고 거기 맞게 산다면, ‘나는 자연인이다’에 나오는 분들은 못 되어도 큰 화는 입지 않으려니 한다. 가뜩이나 돌, 칼이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세상에 말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