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의 주산지를 볼 때 나는 세상이 몰라볼 정도로 변했다는 뜻의 상전벽해를 떠올리게 된다.

자연을 닮으려는 노력 속에서 과학기술은 발전해왔다. 넓은 견지에서 보자면 옷은 동물의 가죽을, 비행기는 새를, 전기는 번개를 모방하려는 노력의 일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은 자연을 모방하는 낮은 차원에서 시작해서 자연을 개선해 자연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발전해 나간다. 그렇게 과학기술은 도약한다.

유물론자인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발전 5단계설을 주장했다. 마르크스가 이렇게 단계를 구분한 이유는 단계를 거칠 때마다 생산력이 급격히 증대되었으며, 이러한 생산력 증대를 가능하게 만든 새로운 형태의 생산수단이 출현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사회관계가 새롭게 형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이란 말 그대로 생산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구이며, 사회관계란 그 도구를 소유하는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의 관계다.

역사발전의 제1단계에 해당하는 원시공산사회는 생산력이 가장 낮은 단계였는데, 생산수단이라 할 만한 도구가 따로 없었다. 인간의 육체가 곧 생산수단이었는데, 남성은 사냥을 하고 여성은 채집을 했다. 이러한 생산수단은 모두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계급없는 무계급의 사회였다.

제2단계인 고대노예제사회에서 생산수단은 토지였으며,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주인으로 군림했다. 그래서 고대노예제사회에서 핵심적 사회관계는 노예와 주인의 관계였다. 이 시기부터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대두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중세봉건사회에서 영주가 착취를 하고 농노가 피착취의 대상이었으며, 생산수단은 장원이었다.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대가 자본주의 사회다. 공장을 생단수단으로 하여, 공장을 소유한 자본가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대립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시대에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은 필연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자본가들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은 지나치게 많이 투자하거나 지나치게 많이 축적하게 되어 결국에는 경제공황을 낳으며 스스로 자멸해 갈 것이라 보았다.

마르크스의 역사 5단계설은 두 가지 잘못을 범하고 있는 듯하다. 우선 마르크스는 인간의 역사가 점진적으로 발전한다는 아주 순진한 생각을 했다. 인간의 역사나 인식은 발전하기보다는 변화한다고 보아야 옳지 않을까. 인간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기도 하며, 특정한 국면에서 비인간적이며 야만적인 일을 저지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2차 대전 때 독일이 유대인에게 행한 것이나,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서 벌인 다양한 전쟁범죄들은 차마 인간으로서 견딜 수 없으며, 차마 인간으로 저지를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변화한다. 그리하여 퇴보를 향하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가 과학기술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증기기관이 기술의 최대치로 보았던 것 같다. 노동자 중심의 공장이 노동자들을 단결시켜 혁명을 가능하게 만들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전 같으면 1천명의 사람이 일해야 했다면 이제는 100명 아니 10명으로, 더 나아가서는 무인공장으로 바뀌고 있다.

오늘날 생산수단은 더 이상 공장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심 역시 중요한 생산수단이 될 수 있다. 사람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욕구가 분출되고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새로운 산업이 생겨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인간이 밀접할 수 있는 물리적 공간은 그렇게 많지 않으며, 1천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도시 또한 그렇게 많지 않다. 그러나 인터넷에 마련된 플랫폼에는 수천 만, 수억 명의 사람이 몰려든다. 이러한 가상의 공간이 새로운 생산수단으로 부상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발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과학기술이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다시 마르크스로 돌아가 보자.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단계를 5단계로 나누어 각 단계마다 혁명이 있었다고 본다. 역사적으로 혁명이라고 불리는 것들에는 러시아혁명, 명예혁명, 미국독립혁명, 청교도혁명, 프랑스 혁명, 쿠바혁명, 4.19 혁명, 문화혁명 등이 있다. 이러한 혁명은 기존의 나쁜 지도자를 몰아내거나 새로운 정치체제를 도입했을 때, 또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위치가 완전히 뒤바뀔 때를 일컫는다. 이런 식이라면 혁명은 많아도 너무 많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혁명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극도로 아낀다. 예컨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바뀌는 엄청난 인식론적 전환 앞에 대해서도, 문명발전의 기반이 되었다고도 해도 좋을 전기가 상용화 되었을 때도 혁명이라는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인간에게 엄청난 편익을 제공한 자동차나 컴퓨터가 발명되었을 때에도 혁신(innovation)이라고 부를 뿐, 혁명이라고 명명하기를 꺼린다. 과학기술은 크게 농업혁명과 산업혁명에 국한하여 혁명이라는 지위를 허락하고 있다. 왜 이렇게 과학은 혁명이라는 말에 야박한 것일까? 과학에서 말하는 혁명은 특정한 변화가 인간 개개인의 삶을 바꿀 뿐만 아니라 집단의 변화로 나아가는 현상, 그리하여 기존의 삶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이 등장하게 될 때를 혁명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