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영조(1694∼1776)가 스스로를 반성하는 한편 세자를 가르칠 목적으로 유교경전과 역사서에서 수신과 위정에 관련된 내용을 주제로 자신의 견해를 기록한 책으로 어제자성편(御製自省編)이 있다.

이 책에서 영조는 수신의 요체를 마음을 다스리는 것으로 보았고, 위정의 요체를 기미(幾微)를 살피는 것으로 보았다. 기미를 살핀다는 것은 선악이 나뉘는 조짐을 살핀다는 것으로 선한 인재를 변별하고 등용하여 국가를 다스리는 바탕으로 삼는다는 의미이다. 영조는 젊은 시절부터 노론과 소론의 격렬한 당쟁을 목도하였고, 왕세제(王世弟)가 되어서는 충신과 역적의 시비로 발생한 신임사화(辛壬士禍)의 참상을 몸소 겪었다.

이를 통해 어느 당파도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왕으로 즉위하자 탕평책을 시행했다. 사적인 호오(好惡)나 당파의 이익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선악에 따라 인재를 등용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정치로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선생의 1569년(선조1) 부교리(副校理)를 사직하는 상소에서 인재등용에 대해 잘 기록하고 있다. 임금은 등용하려는 사람에 대해 국민 모두가 적합한 사람이라고 평가해야 하며, 반드시 훌륭한 점이 있는지를 직접 확인하고서 그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널리 자문하고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등용되는 신하 역시 자신의 능력을 냉철하게 분석하여 군주와 함께 국가발전의 업적을 성취하는 것에 내 능력이 적임자가 아니라면 즉시 물러나서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임금은 어진 인재를 찾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작위와 봉록을 함부로 내주어서는 안 되며, 신하는 스스로의 지조를 지키는 것을 뜻으로 삼아 이익과 명예를 위해 과분한 자리를 받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옛날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워서 임금이 잘못 등용하는 실수가 없기에 신하가 벼슬자리에서 놀고먹는 경우가 없었던 이유이다.

자리나 재물에 대해 구차하게 얻으려고 하지 말며, 어려움을 당하여 구차하게 모면하려고 하지 말라는 예기 곡례(曲禮)편에 실린 교훈이 생각난다. 이 구차함은 크게 둘로, 하나는 밖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의식주와 같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고위직 자리나 재물을 얻으려는 것에 대해 말하면 이것들은 밖에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을 얻겠다고 자신과 약속한 일이라면 그 일 또한 나 자신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자신의 능력이나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그저 번듯함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겉멋을 부리려든다면 그 삶이 얼마나 초라하겠는가.

군부독재에 항거하여 민주주의논리를 폈던 상당수 80년대 운동권들은 짧은 고난으로 긴 영예를 누렸다.

신념을 위해 권력과 싸웠던 그들이 이젠 권력의 중심에서 사실을 조작하려고 한다. 오늘날처럼 공직자의 자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인재 등용의 중요성과 방법을 제시한 영조와 율곡의 글은 ‘조국사태’로 혼란스러운 지금의 우리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