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성 프란체스코가 쓴 평화의 도구라는 시(詩)에 나오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경청에 익숙하지 못한 이유는, 상대를 이해하려는 의도로 대화를 하지 않고 나를 이해시키려는 목적으로 대화를 나누기 때문입니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가 일어나죠. 경청의 목적은 ‘이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해받고 싶은 갈망이 있습니다. 누군가 나를 이해하고 인정해 줄 때 숨통이 트이고 심리적 산소를 공급받습니다. 이해받지 못한 삶, 인정받지 못하는 삶은 우울하고 무기력에 빠질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누군가에게 이해받고 싶어 합니다. 이해받고 싶은 사람 99명이라면 내가 먼저 상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1명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해받고 싶은 사람 999명에 내가 먼저 상대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1명일지도 모릅니다.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입니다.

서로 자기를 이해시키려 몸부림치면 결과는 감정의 충돌, 분노, 절망입니다. 이 순서를 바꿀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가 먼저 상대를 이해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나를 이해시키는 노력은 다음 순서에 하면 됩니다.

상대방이 한참을 떠들며 자신을 이해시키려는 노력에 귀 기울여 주면, 상대는 이해받았다는 안도감과 후련함을 느낍니다. 이때는 조금 마음의 여유를 갖지요. 그럴 때 나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면 상대도 쉽게 나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지 순서만 잠깐 바꿀 뿐인데, 우리는 평화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이지요.

나를 둘러싼 먹구름 아래 고단한 삶은 이해받고 싶어하는 마음의 외침으로 가득합니다. 귀 기울여 주위 신음을 포착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하루이기를 소망합니다. 그대가 평화의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조신영 인문고전독서포럼대표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