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1899∼1961)는 오랜기간 전쟁에 참여하며, 저널리즘과 문학 사이를 오가면서 절제된 문학적 표현으로 20세기 가장 대표적인 소설가로 자리매김하였다.

인간은 살아가며 수많은 한계와 마주한다. 어쩌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 ‘삶’이 아닐까. 태어남에서 죽음 사이에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결정하거나 결정하지 못한 채로, 또는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로 살아가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 명확한 경계가 있었다면 좋으련만, 언제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경험해 보지 않으면 그 한계는 결코 드러나지 않는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아서 충격을 받는 일도 있고, 때로는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아예 하지 않는 일도 빈번하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마주치는 한계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위대한 문학의 주제로 다뤄져 왔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이 늘 마주치게 되는 한계들이 언제나 명확한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일 터. 인간에게 있어 삶은 누구에게나 한 번 뿐인 것인 까닭이리라. 타인의 삶을 다룬 소설을 읽고 문학을 읽으며, 삶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정작 자신의 삶에서 도래하게 되는 한계라는 것에 대해 확신할 수 없다. 그래서 위대한 문학은 언제나 인간이 자신에게 도래한 한계에 대해 인식할 수 없다는 아픈 진실을 건드린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52년 쿠바에서 쓴 <노인과 바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 작품 속 주인공 ‘산티아고’는 ‘늙음’이라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지 않을 수 없을 시간적인 한계에 직면해 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시간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쇠약해가는 힘과 정신, 그리고 그로부터 초래되는 자기 확신의 문제와 관련된다. 분명 예전에는 전설적인 어부였을 테지만, 이제는 늙고 쇠약한 산티아고에게 사람들은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다만, 그에게서 여전히 신화적 환상을 보고 있는, 또 인간으로서 그를 동정하고 있는 아이 하나만이 그를 챙겨준다.

하지만, 산티아고는 여전히 사자의 꿈을 꾸고 있다.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인간이 성장하는 단계를 세 가지로 나누어, 낙타와 사자, 어린아이로 나누고 있다. 자신이 정한 길만을 열심히 나아가는 낙타와, 그 단계를 넘어 누군가와의 인정 투쟁을 거쳐 자기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사자,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초월한 어린아이의 단계가 그것이다. 산티아고는 자신의 늙음에 대해 받아들이기보다는 아직 사자의 꿈을 꾸며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에 어느 누가 그의 바람을 헛된 것이라 비난할 수 있을까.

산티아고는 바람대로 커다란 청새치를 낚고 그와의 사투를 겪고 돌아온다. 그가 낚은 물고기는 돌아오는 길의 고난으로 인해 형체만 남았다. 그는 청새치의 뿔은 아직도 신화적 환상에 빠져 있는 아이에게, 머리는 지금까지 자신을 무시했던 어시장의 사람들에게 넘겨주고 스스로를 위해서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사실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고자 하는 욕망과 한계 사이에서 결정되는 것처럼. 아무 것도 남지 않아도 그 곳에 무언가 의미가 남는 것처럼, 말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