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서울취재본부장
김진호 서울취재본부장

‘초선 국회의원은 국회내 다니는 길을 알고 나면 임기가 끝난다’는 우스갯말이 있다. 이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온 데는 국회를 방문하는 방문객들의 출입이 통제되는, 국회의원회관과 국회 본관, 그리고 국회도서관을 잇는 지하통로의 존재여부 때문은 아닐까 싶다. 일반인들은 알기 어렵고, 출입도 안되는 길이기 때문이다. 방공호를 겸한 듯 보이는 이 통로는 적막감이 들 정도로 조용해 ‘사색의 산책길’로 일컬어져도 좋을 법하다. 이 지하통로 가운데 국회 본관과 국회의원회관을 잇는 길은 본회의나 상임위 회의 및 당무관계로 의원회관 사무실과 본청을 오가는 국회의원들과 보좌진, 그리고 취재진들이 주로 지나다닌다.

며칠 전 국회에 들렀다가 이 통로를 지나다보니 한쪽 벽에는 우리 국토 최동단인 독도의 전경, 일출과 일몰때의 신비한 풍경이 담긴 사진들이 걸려있었다. 바로 그 맞은 편 벽에는 전·현직 국회의원들의 서예작품들이 줄지어 걸려있었다. 작품을 내건 주체들도 다양하다. 국회부의장을 지냈던 6선의 중진 의원으로부터 19대 총선에서 처음 당선된 재선 의원까지, 선수(選數)와 당색(黨色)을 달리하는 의원들의 작품이 다채로운 개성을 뽐내고 있다.

장경순 전 의원이 쓴 매월당 김시습의 글귀에서는 불운한 시대의 천재가 내뱉은 시대의 탄식을 되새기게 한다. 바로 ‘꽃이 피고 지는 것을 어찌 봄이 다스리랴 구름이 가고 오더라도 산은 다투지 않는다(화개화사춘하관 운거운래산부쟁/花開花謝春何管 雲去雲來山不爭)’이란 대목이다. 김시습은 학식에 있어서는 당대 최고였으나 벼슬은 하지 않았다. 그가 잘못된 고관 인사를 보고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런 사람이 이런 자리를 맡게 되었나’하고 탄식하며 지은 한시다. 지금의 국회 역시 국민들로 하여금 김시습의 한탄을 자아내고 있다.

4선의 바른미래당 주승용 국회부의장은 서산대사의 한시인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로 후세의 경계를 삼았다. 전문은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눈 내린 들판 걸어갈 때 발걸음 함부로 딛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이 뒷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이다.

산민(山民) 문희상 국회의장의 ‘태산불양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讓土壤 河海不擇細流)’라는 글귀도 의미심장하다. 태산은 작은 흙덩이도 꺼리지 않고, 강과 바다는 실개천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큰 당과 큰 나라는 인재의 출신과 성분을 가리지 않는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현 시점에선 청강(靑江) 이만섭 전 국회의장이 임오년(2002년)에 쓴 ‘대도재중화(大道在中和)’가 가장 눈길을 끌었다. 큰 도는 중용과 화합에 있다는 뜻이다.

여당에 있었을 때도 정부에 쓴소리를 하며 치우치지 않았고, 야당에 있었을 때도 무작정 발목잡는 반대만 하지 않고 중용의 처신을 보여주려 노력했던 그의 처신이 새삼 아쉬운 요즘이다. 이러고 보니 극한대립의 조국 정국을 지나 ‘포스트 조국’ 해법이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 사색의 산책길에 걸린 지혜가 우리 정치판에 넘쳐 흐르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