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실제 내 생활은 너무 구렁텅이인데 여기 바깥에서는 밝은 척하는 게… 너무 이게 사람들한테 내가 거짓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든 다 뒤에 어두운 부분이 있는데, 바깥에서는 안 그런 척하고 사는 거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살지 말라 해서. 그냥 되게 양면성 있게 살아가고 있어요. 지금.” 10월 14일 스물다섯 나이로 세상과 작별한 설리가 ‘악플의 밤’ 방송에서 남긴 말이다.

공감 가는 말이다. 세상에 그늘진 구석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터놓고 살기 어려운 사회가 우리나라다. 다른 사람 눈치 보면서, 안색 살피면서, 비위 맞춰가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러다보니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도 적잖다. 나의 가치관과 세계관에 입각해서 타자를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한국인은 없다.

혹은 그럴 여건이 아직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가수이자 연기자로서 설리는 강인한 내면을 가진 청춘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사회관계망 서비스에 자신의 견해를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게 밝히는 면모를 보면서 ‘허, 당찬 친구일세!’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힘차고 용감한 젊은이가 늘어나면 우리도 유럽의 청춘 남녀들처럼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아까운 청춘 설리가 세상을 버린 것이다.

본디 죽음은 무겁고 무서우며 견디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삶은 죽음보다 가볍고 유쾌하며 견딜만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로 나왔으니 허무하다. 빛과 그늘이라는 양면성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죽음의 길로 들어섰으니 말이다. 그런 연유로 설리가 선택한 죽음은 그녀가 견뎌야 했던 삶보다 가볍고, 견딜만하며 무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진정 그러한가?! 한국 사회에서 죽음은 그토록 가벼운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왜 이리들 황망하게 지상의 삶과 인연을 끊어버리는 것일까?!

어제 설리가 생을 뒤로 하더니, 오늘 10월 15일에는 거제 단칸방에서 일가족 3명이 목숨을 끊었다는 보도가 나온다. 39세 아버지와 6세, 8세 두 아들이 동반 자살했다는 것이다. 아이들 엄마는 혼수상태로 위독하다 한다.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은 또 무엇인가?!

나라 한쪽에서는 권력 잡겠다는 정파(政派)의 대표자들이 태극기 동반한 칼춤을 추고, 정의로운 검찰은 사법정의를 앞세워 장관을 바꾼다. 태극기와 정의가 막지 못하는 이런 죽음을 어찌 하랴. 권력도, 돈도, 대통령도, 감찰총장도, 법무장관도, 서초동도, 광화문도 결국 부질없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의 앞자리에 인간과 생명과 자유와 평등과 형제애가 우뚝 서야 한다. 그래야 죽어나가는 청춘과 가족이 생겨나지 않는다.

죽음을 가벼이 여기고, 삶을 견딜 수 없을 만큼 무겁고 한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한국사회의 전면적인 혁신과 재생이 절실하다. 최소한의 생명권을 보장하는 인권국가의 면모를 되살리지 않으면, 이 나라의 미래도, 권력도, 돈도, 검찰총장도, 태극기도, 칼춤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