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 나는 말. 이렇게 버티다 갈 때 되면 가면 되지. 이 말씀은 대장암 4기를 앓고 계신 어느 선생의 말씀이다.

이 말씀이 두고두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을 시대와 상황에 대한 감각을 공유하며 지냈던 분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계신 풍경을 바라보는 일은 가슴 아프기 그지없다.

세상 사는 일 본래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을, 힘들다, 힘들다 탄식해 오기를 십 년, 앞으로 십 년은 힘들다 소리 안 내고 참고 참으며 힘있게 살아가기 기약해 본다. 내게 그 십 년이 허용된다면 말이다.

삶의 더할 수 없는 무게에 비추어 보면 텔레비전, 인터넷을 장식하는 오늘의 시사적 이슈들은 구름처럼 덧없고 연기처럼 허무하다.

지난 정부 시대에 팟캐스트를 베개 삼아 잠들고 깨던 시절 내 가장 ‘열렬한’ 스타였던 김어준씨에게 안녕을 고한다. 윤석열, 김갑수 티비, 유재일의 유튜브, 이해생각, 장기표, 최상천의 사람나라, 김경률 같은 새로운 대안체들을 생각하며 떠나보내야 할 사람은 떠나 보내겠다 생각한다. 아둥바둥 매달리지 말 일이다. 이것이,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 일이다. 서초동에 운집한 ‘허무’한 사람 물결을 생각한다. 지난 광화문 촛불혁명을 부러워하며 새로운 혁명을 조산하고 싶은, 그러나 필시 유산될 백일몽 꾸는 집단들을 생각한다. 백만, 이백만, 삼백만, 심지어 오백만 명이면 무슨 일이라도 벌일 수 있는가. 그 헛된 숫자의 공상을 생각하며 웃는다.

이봅시오. 그렇게 큰 ‘관제’ 데모는 박정희, 전두환 때 이후 처음이올시다 그려. 이건 이쪽에 대고 할 말이고. 광화문에 촛불들 모인 게 그렇게 탐나던가요? 그런다고 당장 권력이 바뀐다오? 이건 저쪽에 대고 할 말이고. 허, 참, 지록위마라 하더니, 이 고색창연한, 진나라 때 환관 조고의 고사성어는 어느 호시절 와야 쓸데없이 되리오. 이건 이쪽 저쪽 양쪽 다에다 대고 하고 싶은 말이고.

앞을 봐도, 옆을 봐도, 뒤를 봐도 뾰족한 답은, 길은 보이지 않는다. 뒤돌아서 몇 년 전으로 돌아가기도 보고 싶지 않고, 그렇다고 현재를 원칙과 정의 강물처럼 흐르는 때라 믿고 싶지도 않다.

작가들이 모여서 성명서를 냈다고 한다. 요즘 나는‘나라’를 수호한다느니 검찰을 개혁한다느니 하는 말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민주주의니, 원칙이니, 정의니, 공정이니 하는 말도 옛날에는 알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알 수 없다. 아직도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는 무려 일천이백 하고도 칠십육 분이나 되는 문학인들이 계시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를 다시 읽다 보니,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쓰며 무필(誣筆)을 많이 휘둘렀다고 한다. 어느 중국 사람이 쓴 ‘이태백 시선’에 이백은 “애국시인”이라 했던데, 요즘 그 “애국”이라는 말처럼 인플레가 심한 것도 없다.

나도 앞으로 살면 얼마나 더 살랴. 그래도 힘들다 소리는 안 하고 살겠다 생각한다. 그리고 모르고 잘못 쓰면 몰라도 알면서 그러고 싶지는 않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