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

섬이다.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안으로 문을 걸어 잠군 사람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또 다른 섬에 다다른 또 한 사람. 천혜의 고도가 아니라, 서울 한강변 아파트 숲 속 작은 방에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나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여자 김씨. 그리고 63빌딩이 지척인 한강의 밤섬에 갇힌 남자 김씨.

아파트 현관문을 열면 여자 김씨에게는 언제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섬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그 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아니 열지 않는다. 유람선이 지나가고 인근 아파트와 빌딩의 낮과 밤 풍경을 손에 잡힐듯 지척에 두고서 다가가지 못하는 맥주병 남자 김씨. 아파트의 작은 방에 스스로가 만든 섬에 고립된 여자와 자살시도가 실패로 끝나 밤섬에 고립된 남자의 표류기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표류될 수 없는 곳에 표류된 두 사람의 고립된 표류기가 시작된다.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서, 쾌속의 속도를 자랑하는 첨단의 디지털 세상에서 무엇보다 느리고 불확실한 아날로그적인 방법으로 그들의 커뮤니케이션이 시작된다.

두 명의 김씨는 열렬히 섬 밖의 세상을 갈구하지만 두려우면서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 내레이션은 남자 김씨의 이야기에서 여자 김씨의 이야기로 옮겨 간다. 전혀 공통점이 없는 두 사람의 내레이션은 조금씩 조금씩 서로의 섬으로 다가가고 동화되어 간다. 밤섬으로 떠내려온 쓰레기를 모아 무인도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남자와 일상의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여자. 옥수수에서부터 자장면으로 이어지는 느슨한 연결고리의 에피소드는 마지막 장면에서 극적인 해후를 이룬다.

외로운 섬에서 서서히 달아오르며, 열렬히 갈망하는 한 없이 느린 대화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 대화는 그들이 잡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되고, 고립된 섬에서 타인의 섬으로 도약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무거운 내용을 무겁지 않게, 자잘한 소품 하나까지 세심히 살려 영화 속에서 의미를 부여 한다. 쪽지가 담긴 빈 와인병, 오리배, 옥수수, 빈 깡통, 우산과 민방위 훈련까지 재치있는 소품들이 이야기를 풍성하게 이끈다. 이러한 소품들 중에서 단연 최고는 자장면이다. 빈 짜파게티 봉투에 담긴 수프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에피소드는 세상 최고의 맛을 자랑하는 짜장면으로 완성된다. 야생(?)의 무인도에서 각고의 노력과 인고의 세월을 거쳐 완성되어가는 자장면 만들기는 희망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가를 보여준다.

남자 김씨의 자장면은 잊고 있었던 삶의 또 다른 살아갈 이유가 되고, 이 과정을 지켜보는 여자 김씨에게 자장면은 누군가를 위해, 세상을 향해 손을 내미는 이유와 희망이 된다.

일상의 속도에서 이탈한 두 사람. 그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 아둥바둥했던 이들은 세상 속에서 세상의 속도와는 다른 속도로 이탈한 이들의 세상에 가 닿는다. 세상 모든 속도가 일순간에 정지되는 민방위 훈련 에피소드는 바로 이 두 사람의 속도이며, 이들의 간절한 희망의 순간이 된다.

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이탈하고 싶은 사람과 사람들 속에서 갑자기 밀려오는 외로움과 무너지는 자존감이 엄습해 오는 순간, ‘내 삶에도 민방위 훈련의 싸이렌이 울렸으면’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 무엇보다 자장면이 너무 먹기 싫어질 때나 자장면이 너무 먹고 싶을 때, 이 모든 순간과 이 모든 이들을 위해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를 권한다.

/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이해준 감독의 ‘김씨 표류기는 네이버영화나 구글플레이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