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에 설렁탕이 드문 이유는...

서울 ‘하동관’의 곰탕. 내장을 넣은 것은 변형 곰탕이기 때문이다.

설렁탕은 서울 지방 음식이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중반, ‘경성 종로경찰서’에 설렁탕 배달꾼이 피의자 신분으로 조사를 받았다. 사건은 ‘외상 설렁탕값’에서 시작되었다. 단골집에 설렁탕 배달을 갔다. 외상값이 밀려 있었다. 수금은 배달꾼 책임이다. 밀린 외상값을 달라고 했다. 설렁탕을 배달 시킨 이는 “나는 이 집 객이다. 지금 주인이 없으니 설렁탕값은 나중에 주인에게 받아라”고 했다. 이 말끝에 배달꾼과 객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 시비 끝에 주먹다짐이 오갔다. 둘 다 경찰서 행.

조서에 배달꾼의 말이 남아 있다. “내 뒤에는 설렁탕 배달꾼 300명이 있다”는 내용이다. “우리 큰 조직이야!”라고 엄포를 놓은 셈이다. 당시 경성(서울)에는 냉면, 설렁탕 배달이 성했다. 음식 배달꾼들의 노동조합도 있었다. 300명이라면 적지 않은 숫자다. 주로 종로통 부근에 있었으니 설렁탕 배달꾼이 집집이 서너 명은 있었다는 뜻이다.

당시 경성에는 설렁탕 집들이 유달리 많았다. 협객 김두한의 회고에도 숱한 설렁탕집들이 등장한다. ‘원 씨 성’을 가진 이는 경남 진주 형평사(衡平社) 간부 출신이다. 형평사는 1920년대 백정을 중심으로, 진주에서 시작된 ‘형평 운동’ 단체다. 사회주의 조직이다. 신분제도가 무너졌지만, 여전히 백정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원 씨는 진주에서 형평사 운동을 하다가 서울로 이주, 종로통에서 설렁탕 집을 열었다. 문제는 아이들의 취학이다. 대부분 학부모가 자신들의 아이가 백정의 아이와 같은 학교를 다니는 것을 반대한다. 원 씨는 “신분제도가 무너졌지만 여전히 백정에 대한 인식은 나아지지 않았다”고 항의한다.

설렁탕 집은 서울(경성)에서 널리 유행했고, 진주에도 있었다. 설렁탕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서울 ‘하영호신촌설렁탕’의 설렁탕. 사골, 소대가리, 잡뼈를 곤 국물이다.
서울 ‘하영호신촌설렁탕’의 설렁탕. 사골, 소대가리, 잡뼈를 곤 국물이다.

하루 소 500마리를 도축했다

일제강점기 ‘소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설렁탕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일제강점기에 농, 축산물 생산이 늘어났다. 소의 소비가 늘어났고, 쇠고기 소비도 증가한다. 이때 소 부산물로 만드는 설렁탕 등이 등장했다는 뜻이다. 그렇지는 않다. 일부 맞지만 틀린 표현이다.

조선 후기에 이미 소, 쇠고기의 소비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갑자기 쇠고기 소비가 늘어난 것은 아니다.

설렁탕의 등장은 오히려 ‘느슨해진 금육(禁肉) 정책’ 덕분이다.

조선은, 삼금(三禁)의 나라다. 금육(禁肉), 금송(禁松), 금주(禁酒)다. “쇠고기 먹지 마라, 소나무 베지 마라, 술 마시지 마라”가 국가의 주요 정책이다.

모두 농사, 식량 확보와 연관이 깊다. 소나무를 베면 홍수가 난다. 술을 많이 마시면 결국 곡식이 허비된다. 곡식은 농본 국가의 주요 어젠다다. 소도 마찬가지. 우역(牛疫)이 돌면 정부는 “성한 소를 사고 지역으로 보내서 농사에 지장이 없게” 했다. 함경도의 멀쩡한 소를 수백, 수천 마리 삼남지역으로 보낸다. 심한 경우, 중국에서 소를 수입했다. 쇠고기를 먹는 일은 농사를 망치는 일이었다. 쇠고기 낭비를 철저하게 막았다. 문제는 민간이다. 민간에서는 여전히 쇠고기 먹는 일을 즐겼다. 정부에서는 강력하게 막고, 민간에서는 여전히 쇠고기를 즐겼다. 민간이, 반가(班家) 혹은 권력 계급이니 막기가 힘들었다.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_호전6조_권농’의 기사다. 제목은 ‘농사는 소로 짓는 것이니 진실로 농사를 권장하려 한다면 마땅히 도살을 경계하고 목축을 권해야 할 것이다’이다.

 

영천 공설시장 ‘포항할매곰탕’의 곰탕. 정확하게는 설렁탕이다.
영천 공설시장 ‘포항할매곰탕’의 곰탕. 정확하게는 설렁탕이다.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중략) 중국에서는 소의 도살을 금한다. 북경 안에는 돼지고기 푸줏간이 72개소, 양고기 푸줏간이 70개소가 있어서 (중략) 고기를 이같이 많이 먹는데도 쇠고기 푸줏간은 오직 2개소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매일 잡는 소를 계산하면 500마리가 된다. 나라의 제향(祭享) 때나 호상(犒賞) 때에 잡는 것, 또는 반촌(泮村)과 서울 5부(五部) 안 24개소의 푸줏간에서 잡는 것, 게다가 전국 300여 고을마다 관에서 반드시 푸줏간을 열게 한다. 작은 고을에서는 날마다 소를 잡지는 않으나 큰 고을에서 겹쳐 잡는 것으로 상쇄되고, 또 서울과 지방에서는 혼례와 잔치, 장례, 향사(鄕射) 때 그리고 법을 어기고 밀도살하는 것을 대강 헤아려 보아도 그 수가 이미 500마리 정도가 된다. (후략)

하루 500마리를 도축한다. 셈법도 정확하다. 전국 300개의 지방 관청마다 푸줏간(懸房, 현방)이 있다. 합법적인 도축 기관이다. 작은 곳에서는 소를 잡지 않는 날도 있지만, 큰 곳에서는 하루 몇 마리도 도축한다. 어림잡아 하루 한 마리씩 도축한다고 셈했다.

서울이 문제다. 서울은 5부로 나누었다. 도성 안이다. 이곳에 푸줏간이 24개소. 여기서 200마리쯤 도축한다. 합계 500마리. 박제가나 정약용 모두 한양에 살았으니 한양의 도축 숫자는 비교적 정확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루 500마리 도축’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초반의 일이다. 망국의 시기보다 100년쯤 앞선다. 망국 100년 전에 이미 쇠고기 생산, 소비는 상당했다. 일제강점기 쇠고기 생산, 소비가 늘었고 설렁탕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틀렸다.

 

포항 ‘장기식당’ 곰탕. 국물이 설렁탕보다 맑다. 고기 부분이 많기 때문.
포항 ‘장기식당’ 곰탕. 국물이 설렁탕보다 맑다. 고기 부분이 많기 때문.

금육이 무너지니, 설렁탕이 생겼다?

쇠고기 생산, 소비가 늘고 설렁탕이 유행한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다.

나라가 무너지면서, ‘금육’ 정책도 무너졌다.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에는 사회 질서가 무너지면서 금육 정책도 무너졌다. 정조 사후(1800년)부터 조선이 공식적으로 망하는 1910년의 ‘한일늑약(韓日勒約)까지 110년 동안 조선의 사회 체재는 서서히 허물어진다. 쇠고기 식육을 강하게 막던 정부 정책도 힘을 잃는다.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 민간의 쇠고기 소비가 얼마간 늘어났다.

서울 ‘이문설렁탕’은 1904년 무렵 문을 열었다. 대한제국(1897-1910년) 시기다. 금육 정책은 완전히 무너졌다. 민간의 쇠고기 소비가 자유로워지고, 더불어 상업행위도 활발해진다. 국가의 공식적인 시전(市廛)도 무너졌다. 길거리 사설 식당은 주막이다. 주막에서는 주로 개장국을 내놓았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근대화된 식당들이 나타난다. 일제는 세금을 목적으로 적극적인 ‘가게 창업 신고’를 장려했다.

조선 말기에도 쇠고기 소비가 있었다. 소의 부산물인 뼈, 대가리, 꼬리 등을 버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탕, 국[羹, 갱]으로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음식을 이르는 정식 이름이 없었을 뿐이다. 1776년(정조 1년)의 기록물인 ‘명의록’에는 개장국 집이 등장한다. ‘쇠고기 부산물로 만든 음식’이 아니다. 쇠고기 소비가 비공식적이면 쇠고기 부산물로 만든 음식을 지속적으로 만들고, 공공연히 팔기는 힘들다. 정조 시절에도 개장국이 최선이었다. 설혹 쇠고기 부산물로 음식을 만들더라도 ‘구장(狗醬, 개장국)’같은 이름을 쓰지 않았다.

금육 정책과 공식적인 시장, 시전이 무너진다. 주막과 사설 식당이 활성화된다.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진다. 한양도성에서 설렁탕은 개장국을 대신하는 음식으로 등장한다.

 

전남 나주 ‘하얀집’의 곰탕.
전남 나주 ‘하얀집’의 곰탕.

설렁탕과 육개장

서울 ‘이문설렁탕’이 생기고 경북의 중심도시 대구에서 육개장이 시작된다. 모두 개장국 대용품들이다. 서울의 경우, 주막의 개장국이 식당의 설렁탕으로 대체된 된 것이다.

해방 후에는 변형된 설렁탕도 나타난다.

포항 죽도시장에는 ‘곰탕집 골목’이 있다. 소머리곰탕이다. 영천 공설시장 안에는 몇몇 곰탕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고기 곤 전통 곰탕도 있지만, 내장, 소머리 등을 곤 변형 곰탕도 많다. 경북, 대구에는 설렁탕 전문점은 귀하다. 지방도시인 전남 나주에도 곰탕 노포들이 많다. 나주의 곰탕은 서울 ‘하동관’ 곰탕과 닮았다. 맑은, 고기 곤 국물이다. 포항 죽도시장 ‘장기식당’의 곰탕은 소머리 곰탕이다. 정확하게 짚자면, 곰탕이 아니라 설렁탕이다. 언론인 고 홍승면 씨는 수필 ‘백미백상’에서 “설렁탕 집 옆을 지나가다가 하얗게 탈골한 소머리를 보고 질겁한 후 오랫동안 설렁탕을 먹지 못했다”고 했다. ‘장기식당’의 곰탕은,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소 대가리 중심의 설렁탕이다. 소 대가리 뼈나 사골, 잡골 등으로 국물을 내고, 머릿고기 등을 넣은 것은 설렁탕이다.

서울을 제외한 지방 특히 경북 지방에는 설렁탕 전문점이 드물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머리곰탕 등의 이름으로 이미 진한 설렁탕을 먹고 있기 때문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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