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박근혜 정부 시절이 생각난다. 세월이 빠르다더니 벌써 이 년하고도 반이나 흘렀나보다. 돌이켜보면 어지럽기도 어지간히 어지러운 시간이었다. 대통령이 탄핵되던 그 겨울에 우연히 SBS 8시 뉴스를 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내 이름이 열 댓명 이름 속에 들어 있었고 그것도 지금은 작고한 비평가 황현산 씨 옆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이름하여 블랙리스트라는 것이었는데 무슨 무슨 심사위원장을 맡겨서는 안 되는 사람들 목록이라고 했다.

온갖 블랙리스트들에 없던 내 이름이 8시 뉴스에 등장한 일은 기이하고도 소름끼치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일은 내 이름을 블랙리스트에 올린 정부 당국의 ‘핑계’였다. 이름하여 그 열댓 명은 제주도 강정 해군기지 건설에 반대하고 경상북도 성주 사드 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서명을 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나 자신에 대해서만은 정확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나라에 미군이 주둔하거나 철수하는 일 같이 ‘엄청난’ 일에는 한 번도 의사를 표명한 적이 없다.

제주 해군기지 문제나 성주 사드 문제는 미국의 극동 전략에 관계되는 문제이고 아름다운 제주나 성주가 군사기지화 되는 것은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일개 서생인 내가 이 문제를 갖고 왈가왈부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어떻게 ‘감히’ 그런 문제에 서명하는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지난 정부는 나를 반미주의자로, 있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씌워 낙인 찍어 마땅한 사람으로 둔갑시켰던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세월호 참사의‘비밀’에 관심을 갖는 내가 심히 못마땅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지난 정부의 사나운 심사는 이해가 가지만 한밤에 반미주의자가 된 아들의 이름을 들어야했던 나의 부모님은 무슨 죄를 지었더란 말인가.

정부가 바뀌고 이제는 걱정과 두려움 없는 시대를 살아갈 수 있으려니 했다. 소나 말 궁둥이에 낙인을 찍고 죄인의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겨 넣는 시대는 지나갔으려니 했다. 그런데 근거는 분명하지 않지만 신문이나 방송에 오르내리는 뉴스나 각종 포털 사이트에 올라오는 ‘실검’ 순위 목록을 보면 뭔가 심상치 않은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난 정부에서처럼 피부에 와닿는 방식은 아닌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 같은 이 이상한 기운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년 반 동안 ‘새로운’ 세상을 살면서 나쁜 꿈에서 이제는 깨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정녕 바라마지 않는다. 나쁜 꿈에서 이제는 깨어나서 밝은 대낮의 삶을 살고 싶노라고. 이 우려가 기우에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