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울릉도, 맨주먹으로 가슴을 때리는 뭉클함

행남해안산책로의 포장마차 ‘용궁’.

파랑이 다가설수록 빨강은 수줍게 물러난다. 울릉 바다의 해질녘은 꼭 젊은 남녀의 사랑싸움 같다. 도무지 잡히지 않을 것 같던 석양의 옷자락이 파도가 뻗은 손에 붙들리는 순간, 바다와 하늘이 포옹한다. 파랑으로 빨강이 스며들 때 수평선은 보랏빛 이불을 덮고, 빨강으로 파랑이 달려들 때 낮별들은 분홍색 꽃잠이 된다. 그 황홀한 로맨스의 시간에 나는 홀로 행남해안산책로를 걸었다.

낮에 이 길을 걸을 때, 저녁 바다와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일 자리를 미리 점찍어뒀다. 해안산책로 초입에 있는 포장마차 ‘용궁’에 앉았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갯바위를 때리는 파도 소리가 화음을 이뤄 듣기에 좋았다. 모둠해산물 한 접시를 시켰다. 옆 테이블에 앉은 어르신들이 나보다 먼저 저물녘 바다에 사로잡혀 있었다. “분위기 좋다”고 감탄하는 소리가 스피커와 파도 사이로 끼어들어 장단을 맞췄다. 곧 싱싱한 오징어회와 전복, 소라, 멍게, 그리고 제철은 아니지만 초장을 듬뿍 찍으면 그런대로 먹을 만한 방어회로 구성된 모둠해산물이 상에 올랐다. 내가 술잔을 비우면 파도가 빈 잔에 술을 채웠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바람의 음계가 반음 내려가 쌀쌀했다. 뜨거운 국물 생각에 오징어라면을 시켰다. 양은냄비를 비워 속이 훗훗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들이 바다로 자맥질하고 있었다. 밤바다 위를 어칠비칠 걸어 도착한 도동항의 낡은 여관, 이불을 깔고 누우니 창을 흔드는 바람 소리가 다행히 꿈결만은 흔들지 못했다.
 

섬 한바퀴 돌 수 있는 ‘울릉 일주도로’ 타고
저절로 경건해지는 바다의 풍경 눈에 담아
하늘서 내려와 목욕하다 ‘삼선 바위’ 됐다는
세 선녀는 지금 껏 푸른 물에 살을 씻고 있다

섬은 육지보다 일찍 눈을 뜬다. 동쪽의 머리맡으로는 매일 신선한 빛이 신문과 우유처럼 배달된다. 새벽 5시 30분, 섬이 기지개를 켜 나도 잠에서 깼다.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겉옷을 입고 도동항에 나섰다. 어부와 상인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동안 여행객들도 졸린 발을 끌며 섬의 아무 동쪽으로나 가고 있었다. 나도 걸었다. 몇 걸음만 가면 도동항 여객터미널과 이어지는 공중공원, 부지런한 사람들이 난간에 기대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맘때 울릉 바다는 오전 5시 50분에서 6시 사이에 해를 돋아낸다. 해돋이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시린 손에 입김을 불어넣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바람에 모자가 날아가지 않게 붙잡고, 해 뜨기 전 어둠과 빛이 뒤엉켜 추는 오묘한 춤을 사진에 담았다.

“올라온다, 올라와!” 저 먼 수평선에서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붉은 이마를 누군가가 먼저 본 모양이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어둠 뒤에서 빛과 열을 끌어 모은 태양이 바다에 불을 지르며 솟아오르고 있었다. 웅성거리던 사람들은 이내 말을 잊었다. 울릉도의 해돋이가 워낙 장엄한 까닭이리라. 태양이 펼친 붉은 돛을 열심히 밀어주는 바람의 기합소리만 들렸다. 점차 완전한 원의 형태가 되어가는 태양을 보면서, 얼굴이 금빛으로 물든 사람들은 소원을 빌고, 사진을 찍었다. 나도 사진 몇 장을 찍고는 걸음을 돌렸다. 하품이 났다. 다시 여관방에 누워 한 숨 자고 일어났더니 두어 시간 전에 본 해돋이가 마치 전생의 풍경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도동항 ‘두꺼비식당’의 오징어내장탕.
도동항 ‘두꺼비식당’의 오징어내장탕.

대부분 관광지가 그러하듯 울릉도의 식당들도 1인분은 잘 팔지 않는다. 울릉도를 대표하는 음식이라 할 수 있는 오징어내장탕, 따개비밥, 홍합밥, 오징어불고기 등은 2인분부터 주문이 가능하다. 그래서 1인분 파는 식당을 만나면 몹시 반갑다. 도동항 ‘만남의 광장’ 근처에 있는 ‘두꺼비 식당’에 들어가니 아침식사를 하는 손님들이 제법 많았다. 속풀이와 배멀미에 좋다는 오징어내장탕을 주문했다. 주문과 동시에 조리해서 15분 만에 음식이 나왔다. 매운탕 국물에 애호박, 콩나물, 대파, 다진 마늘 등 채소와 오징어 내장이 듬뿍 들어간 것이 두꺼비식당의 오징어내장탕이다. 내심 맑은 국물을 기대했는데, 울릉도에서도 식당마다 끓여내는 방식이 다른 모양이었다.

오징어내장탕은 오징어를 손질하다 대개 버리게 되는 오징어 내장을 재료로 한 향토 음식이다. 오징어 내장은 쉽게 부패해 보관이나 손질이 어렵고, 기생충 위험이 있어 식용으로 적합하지 않지만, 그날 잡아 그날 손질하는 울릉도 오징어의 경우 신선도가 매우 뛰어나 내장을 얼마든지 식재료로 쓸 수가 있다. 오징어내장탕은 울릉도에 오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인 셈이다. 국물을 한 숟가락 떠 먹어보니 얼큰하면서도 간이 좀 셌다. 호박 맛이 강해 호박찌개 같다는 인상도 들었지만 오징어 내장에서 깊은 바다 냄새가 났다. 밥과 함께 후룩후룩 떠 먹다가 어느새 사발을 다 비웠다. 울릉도 음식은 꼭 겉은 한없이 무뚝뚝한데 속은 다정한, 표현에 서툰 우리 아버지들을 닮았다. 내일 또 오겠다고, 아버지를 어려워하는 아들마냥 말을 흐리며 식당을 나섰다.

울릉도의 3대 비경 중 하나로 꼽히는 삼선암.
울릉도의 3대 비경 중 하나로 꼽히는 삼선암.

차를 몰고 울릉도를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지난 3월, 울릉읍 저동리에서 북면 천부리까지를 잇는 도로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약 5㎞에 달하던 간극이 메워졌다. 오랜 세월 울릉군민은 물론 관광객들의 염원이기도 했던 울릉도 일주도로의 완전 개통이 이뤄진 것이다. 나는 그 사실을 울릉도에 와서야 알았다. 늦게 소식을 들은 만큼 새 길부터 다녀보자며, 우선 도동항을 출발해 저동항, 내수전, 와달리를 지나 북면 천부항까지, 올해 개통된 구간을 답사하며 울릉 해안선의 절경을 감상하기로 했다. 도로는 개통됐지만 여전히 곳곳에선 공사가 한창이었다. 연속된 급커브와 경사로, 비포장길이 많아 운전에 능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위험할 수도 있다. 버스나 관광 택시를 이용해도 충분히 섬 한 바퀴 구석구석 다닐 수 있으니, 현지 교통수단 이용을 권한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울릉 바다의 풍경은 섣부른 묘사나 상투적 감탄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절대자 앞에서 인간이 겸손해지듯, 나는 저동 촛대바위 앞에, 또 섬목에서 바라보는 대나무섬 죽도의 풍경 앞에 저절로 경건해졌다. 촛불을 켜놓고 신의 계시를 기다리는 수도자처럼, 이어도를 보며 ‘황홀한 절망’을 느낀 천남석처럼 내 내부에는 울릉도에 대한, 자연에 대한 신앙심이 깊어졌다. 제주도나 국토 최서남단 가거도에서 느낀 것과는 성분이 다른 감동이 울릉도에 있었다. 보다 거칠고 투박하며 맨주먹으로 가슴을 때리는 뭉클함이랄까. 괭이갈매기들의 천국인 관음도를 향해 새들이 떼 지어 날아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울릉 바다의 경치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하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 삼선(三仙)바위가 된 세 선녀는 현무암 검은 알몸을 내놓은 채 지금껏 푸른 물로 살을 씻고 있었다.

천부해중전망대에서 감상하는 바다 속 세계.
천부해중전망대에서 감상하는 바다 속 세계.

바람과 파도가 주먹으로 가슴을 쿵쿵 때려대는 통에 흥분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마음을 가라앉히려면 먼저 몸을 가라앉혀야 한다고, 스스로 세운 가설에 이상하게 설득되어 바다 속으로 한번 내려가 보기로 했다. 울릉도에서는 스쿠버다이빙을 하거나 잠수함에 타지 않아도 신비로운 바다 속 세계를 구경할 수 있다. 북면 천부에 있는 천부해중전망대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수중 전망대다. 천부항소공원에서부터 바다 쪽으로 이어진 다리 끝까지 걸어가면 파란 페인트칠이 인상적인 원통형 모양의 전망대가 나타난다. 높이는 총 22m 가량인데,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해수면 아래 수심 6미터 지점까지 내려가면 넓은 유리창을 통해 바다 속을 볼 수 있다.

울릉도 도동에서 바라본 해돋이의 장관.
울릉도 도동에서 바라본 해돋이의 장관.

나선형 계단을 빙빙 내려가 거대한 바다를 텔레비전 크기로 축소해놓은 창 앞에 선 순간, 나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말았다. 돌돔, 자리돔, 복어 등 다양한 물고기들이 푸른 바다 속을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 속 풍경을 볼 수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는데, 울릉도 여행에서 얻은 뜻밖의 선물이었다. 그러나 천진한 동심도 잠시 뿐, 환한 미소는 이내 사라지고, 낚시꾼의 본능이 꿈틀거리면서 미간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연산 돌돔회의 탱글탱글한 육질, 그 달면서도 고소한 감칠맛 생각에 침이 막 고인 것이다.

물속에 있다가 물 밖으로 나오니 울릉도가 낯설었다. 변덕스러운 섬 날씨가 몰아왔던 먹구름도 걷혀 하늘이 맑았다. 마치 침례를 받은 교인처럼, 마음이 깨끗해진 나는 불현듯 천국이 궁금해졌다. ‘울릉 천국’을 향해 차를 몰았다.          /시인 이병철

    시인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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