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기사환국(己巳換局)과 퇴우당 김수흥(金壽興)

퇴우당 김수흥 유적비. 2008년 장기사람들이 자비(自費)로 장기충효관 뜰에 세웠다. 이는 임금을 공경하고 백성을 사랑하였던 그의 어진 마음씨가 장기사람들의 사상 속에 스며들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1690년(숙종 16) 10월 12일, 사늘한 바람이 간간히 불어오는 들녘에는 가을걷이가 한창이었다. 외지 손님이라곤 손꼽힐 정도로 한적하던 경상도 장기 땅이 갑자기 시끌벅적해졌다.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허겁지겁 내려왔고, 장기현감은 이들을 수발하느라 혼비백산이었다. 이유를 들어보니 작년 2월에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영의정이 갑자기 객사를 했다는 것이다. 죽은 사람의 직책도 그렇거니와, 그가 다름 아닌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인 김수흥(金壽興)이었다. 그의 명성하나로도 전국의 이목이 경상도 장기현으로 집중되기에는 충분했다.

김상헌은 절개와 지조의 상징이었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던 그가 후에 청나라에 끌려가면서 지은 시조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필수고전 시가가 되었다. 조선후기의 대표적 세도가문인 안동(장동) 김씨는 실질적으로 김상헌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이 집안도 한 때 이처럼 고통을 겪을 때가 있었고, 그 고뇌의 현장이 바로 경상도 장기현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그 사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숙종 집권기의 환국정치에 대해 약간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

환국(換局)은 ‘시국 또는 판국이 바뀌는 것’을 일컫는데, 숙종의 재위 기간에만 세 번의 환국이 있었다. 숙종은 이 환국정치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뜻대로 정치를 이끌어 갔다.

숙종이 임금 자리에 오를 때의 집권세력이었던 남인은 힘이 너무 강했다. 그 유명한 우암조차 몰아낸 무소불위의 세력이었다. 그래서 숙종은 남인의 힘을 약화시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남인의 영수였던 영의정 허적이 자신의 아버지 잔치를 위해 왕의 허락도 받지 않고 궁궐에서 쓰는 천막을 집으로 가져가고, 궁궐의 악공들을 동원한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남인들을 역모로 몰아 쫓아내고 서인들을 적극 등용하는데, 이를 경신환국(1680)이라 한다.

이렇게 권력을 다시 잡은 서인들은 자기들 세상이 영원할 줄 알았다. 이제 모든 자리가 서인 일색이었으니 자신들이 지도권을 놓칠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숙종의 생각은 달랐다. 두 번째 정치 승부수가 1689년에 일어난 기사환국이다. 이 해에 궁녀 장옥정이 낳은 왕자 윤(昀)을 원자(元子)로 책봉하는 문제를 놓고 남인과 서인 간에 격돌이 일어났다. 숙종은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옥정을 희빈(禧嬪)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당시의 집권세력이던 서인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정비(正妃) 민씨(인현왕후)가 아직 나이가 젊으므로 그녀의 몸에서 후사가 나기를 기다려 적자(嫡子)로서 왕위를 계승함이 옳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인들은 숙종의 주장을 지지했다. 숙종은 어느새 왕권을 능가하는 세력으로 성장한 서인의 전횡을 누르기 위해서는 남인의 도움이 필요했다. 숙종은 남인을 재등용하는 한편, 원자의 명호를 자신의 주장대로 정하고 장옥정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왕비 인현왕후 민씨는 쫓겨났고, 송시열은 삭탈관작 당하고 제주로 귀양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때 송시열과 같은 계열에 섰던 김수흥도 관작을 삭탈당하고 장기현으로 유배되고, 동생인 김수항도 남인들의 공격을 받고 사사되는 등 서인의 거물 100여 명 이상이 파직되거나 유배를 갔다. 그 대신 권대운·김덕원·목래선 등의 남인이 정치적 실세로 등용되었다. 이게 기사환국이다.

김수흥의 문집인 퇴우당집. 이 책 안에는 ‘봉산잡기’라고 하여 장기에서 지은 글들이 상당수 있다. ‘봉산’은 ‘장기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김수흥의 문집인 퇴우당집. 이 책 안에는 ‘봉산잡기’라고 하여 장기에서 지은 글들이 상당수 있다. ‘봉산’은 ‘장기현’의 또 다른 이름이다.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들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1694년 다시 한 번 환국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숙종은 희빈이 너무 방자하게 굴자, 민씨(인현왕후)를 쫓아낸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인들 중 일부가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을 비밀리에 전개했고, 이것을 안 남인들은 민씨 복위 운동에 관여한 서인들을 몰아내려 했다. 그러나 숙종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오히려 남인 세력을 쫓아내고 서인을 다시 등용했던 것이다. 기사환국으로 왕후(王后)가 된 장씨를 다시 희빈으로 강등시키고, 인현왕후 민씨를 복위시켰다. 이해가 1694년 갑술년(甲戌年)이라고 해서 갑술환국이라고 한다.

기사환국으로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김수흥은 호가 퇴우당(退憂堂)이다. 동생도 영의정을 지냈는데, 앞서 언급한 김수항이다. 이들 형제들은 조선후기에 문명을 떨쳤던 장동(壯洞)김씨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서울 장의동(壯義洞)을 터전으로 한 장동김씨는 원래는 안동김씨인데, 이들만 따로 신안동김씨라고도 한다.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한 김상용, 앞서 언급한 김상헌 등이 이 가문에서 나와 충절로 가문을 빛냈다. 김상헌에게는 수증·수흥·수항이라는 세 명의 손자가 있었는데 모두 높은 벼슬을 하여 이 삼형제를 삼수(三壽)라고 했고, 증손인 창집·창협·창흡·창업·창집·창립 등 여섯 명도 모두 걸출하여 이들을 육창(六昌)이라 했다. 이들 삼수육창(三壽六昌)은 조선후기의 정치·사상·문화·학술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에도 김원행, 김조순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명성과 덕망을 드날렸다. 순조 때 김조순을 시작으로 조선후기 안동김씨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1626년(인조4) 10월 16일 태어난 김수흥은 조부 김상헌으로부터 가학을 이어받았다. 김상헌의 학통은 율곡과 김장생으로 이어온 서인이었다. 따라서 김수흥은 송시열과 송준길로 이어진 서인 학문의 정맥을 접하게 된 것이다.

명문가에서 성장한 김수흥은 동생 김수항과 함께 문과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요직을 거치다가 36세에는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품계에 올랐으며 사간원 대사간, 한성부 우윤, 승정원 도승지 등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그의 호인 퇴우(退憂)가 말해주듯 그는 벼슬에 나아갔을 때에나 벼슬에서 물러났을 때에도 임금과 백성에 대한 근심을 우선적으로 하였다. 48세에는 종1품의 품계에 올라 판의금부사를 지냈으며, 다음해 국정 최고의 자리인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김수흥은 남들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듯 했으나, 현종과 숙종 연간에 빈번하게 일어난 옥사(獄事)로 인하여 유배와 은거를 하는 등 부침이 많았다. 1674년 2차 예송논쟁에서 서인이 패하고 남인이 집권하자 춘천으로 유배를 다녀오는 가하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영중추부사로 복직했다. 아우 김수항의 뒤를 이어 1688년에는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1689년 2월에 기사환국으로 된서리를 맞고 장기사람들과 인연을 맺은 것이다.

김수흥의 간찰.
김수흥의 간찰.

장기로 온 김수흥은 마치 15년 전에 이곳에서 왔던 우암 송시열이 그랬던 것처럼 장기사람들 틈에 끼여 토속을 즐기며 강학에도 힘썼으나, 아쉽게도 이듬해인 1690년 10월 12일 병을 얻어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65세였다. 그의 갑작스런 객사는 <조선왕조실록>에 졸기(卒記)가 실릴 정도로 세상의 이목거리였다.

장기에서 죽은 김수흥의 관(棺)은 경주를 통해 서울로 갔다. 김수흥의 상구(喪柩)가 올라갈 때에, 경주 영장(營將) 남헌(南巚)은 편오군(編伍軍) 2개 부대를 편성하여 그의 관을 메도록 지시한 사실이 있었다. 나중에 남인들이 이를 알고 문제 삼아 남헌은 사헌부에 잡혀가 모진 고문을 당해야만 했다.

김수흥은 오랫동안 관직생활을 하면서 그 시대에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일들에 관련된 수많은 상소와 차자(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려 당시의 병폐를 지적하였고, 이를 시정할 계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국정에 대한 다양한 의견의 개진은 충군우민(忠君愚民)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0권 5책으로 편찬된 그의 문집 <퇴우당집(退憂堂集)>에 소차(疏箚)·계(啓)·의(議)가 6권이나 될 정도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서, 그가 시무(時務)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의 문집에는 장기 유배지에서 쓴 시들도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그 중 몇 편을 소개하면 이렇다.

장기 배소에 도착하여 의금부 감압관 오수대(吳遂大)를 조정으로 보내며/ 到長鬐配所 別吳金吾 遂大 還朝

큰 바다가 동쪽에 붙어있고/ 大海東臨近
무리지은 산들은 북쪽멀리 아득하네/ 群山北望遙
떠도는 삶은 본래 이와 같은 것/ 浮生本如此
함께 한 자 보내고 나니 내 넋조차 사라지네/ 莫遣旅魂消

영남대로 봄바람 사납지만/ 嶺路春風厲
강담(江潭)의 풀 색깔은 새롭구나/ 江潭草色新
외로운 신하 임금 그리워 눈물짓고/ 孤臣戀君淚
북쪽으로 돌아간 사람 지워지질 않네/ 灑向北歸人

봉산에서 보고 느낀 일/ 蓬山卽事

한양에서 10년 동안 이룬 것이 고작/ 京洛十年成底事
천리 밖 바닷가에 여생을 부치는 일인가/ 海山千里寄殘生
짧은 봄밤에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春宵旅榻仍無寐
자리에 누워 거센 파도소리만 듣고 있네/ 臥聽長鯨鼓浪聲

장기에서 불행한 최후를 맞았던 김수흥은 1694년 갑술환국 때 송시열과 같이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가 죽은 지 5년 만이었다. 이때부터 사림들이 우암 송시열을 향사하는 원사(서원·사우 및 영당)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장기사람들도 우암 영당(影堂) 건립을 추진했다. 현재 장기면 읍내리 용전이란 곳에 터를 마련하고 1707년에 죽림서원 건축을 시작하여 1708년에 완공을 보았다. 1709년 4월 6일에는 우암 영정을 봉안하였고, 퇴우당 김수흥의 문집도 같이 이곳에 보관하였다.

이렇듯 김수흥은 정국의 변동에 따라 부침이 심하였지만 충군우민(忠君憂民·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사랑함)과 선우후락(先憂後樂·다른 사람보다 먼저 근심하고 즐길 것은 다른 사람보다 나중에 즐김)하는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이러한 의식은 그의 문학세계에도 깊이 스며들어 젖어 있다. 그리고 죽림서원과 이곳으로 유배를 왔던 또 다른 노론계 인맥들을 통해 장기사람들에게도 그의 사상이 깊이 전파되었음은 부인할 수가 없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