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마침내 울릉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파랑으로

행남해안산책로의 절경인 해식동굴.
행남해안산책로의 절경인 해식동굴.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鬱陵島)로 갈거나/ (….)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風浪) 따라/ 밀리어 오는 듯도 하건만”

유치환의 시 ‘울릉도’다. 시인은 동쪽 먼 바다의 한 점 섬 울릉도를 애타게 불렀는데, 지난 여름 내 그리움도 청마 못지않았다. 섬이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동안 나 역시 섬으로만 향하는 마음에 가슴이 일렁였다. 하지만 섬이 뭍으로 밀려올 수 없듯 나도 섬으로 흘러가지 못했다. 두 번의 태풍이 뱃길을 막았기 때문이다. 금지된 것은 언제나 더 큰 욕망을 일으키는 법이어서 내 마음은 지난 여름 내내 울릉도에 살았다. 미지의 옛 나라인 우산국의 백성이 되어 이사부의 정벌군처럼 몰려오는 태풍을 원망해보기도 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섬을 향한 그리움이 짙어질수록 여름 끝자락에서 내 입술은 때 이른 단풍처럼 붉어져만 갔다.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 입술은 달아오른다. 울릉도를 말하고 싶어서, 노래하고 싶어서, 이 기행문을 통해 섬과 대화하고 싶어서 입술은 물론 손끝까지 벌게지는 동안 추석 지나고 가을이 됐다.
 

포항서 출항하는 썬플라워호에 몸 싣고
3시간 40분 간 사색의 시간을 즐겨본다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해 발 내딛자마자
상인들 “이리 오이소” 활달한 호객 소리

숱하게 밟고 다닌 따개비로 끓인 칼국수
파도의 시원함과 등대불빛 온기 닮은 맛
해식동굴 풍경 사진 SNS에 업로드 하니
친구들은 “지중해에 있느냐”고 감탄한다

마침내 바다가 길을 열어주었다. 요란한 가을장마와 제17호 태풍 ‘타파’ 사이에서 동해는 며칠 밤낮으로 가만히 다정했다. 울릉도로 가는 바닷길은 네 갈래다. 강원도 강릉과 묵호, 경북 후포와 포항에서 여객선을 탈 수 있다. 서울에서는 강릉이나 묵호가 가깝고, 후포에서 배를 타면 3시간 채 걸리지 않아 울릉도에 닿는다. 하지만 나는 포항에서 출항하는 썬플라워호에 몸을 실었다. 울릉도를 오가는 가장 큰 여객선이기 때문이다. 울릉도로 가는 사람들의 표정이 궁금했다. 누군가는 얼굴이 환하고 누군가는 안색이 어둡겠지. 어떤 이는 행복을 좇아서 가고 또 어떤 이는 불행으로부터 도망쳐 갈 것이다. 그 ‘사람의 얼굴’을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나는 아침 9시 50분, 거대한 선체 위에 가을 아침 햇살이 샛노란 해바라기를 피워낸 썬플라워호에 올랐다.

평일인데도 여객선 안은 붐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울릉도를 찾는 줄은 몰랐다. 추석 연휴에만 무려 7천 명의 관광객이 들어왔다고 한다. 울릉도 인구가 1만 명인데, 명절 동안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사람들로 섬이 보름달처럼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연휴가 끝나도 울릉도로 가는 사람들 발길은 끊이지 않는 듯했다.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는 여객선 안, 어떤 사람들은 바닥에 담요를 깔고 눕고, 또 어떤 사람들은 컵라면과 삶은 계란을 먹고, 또 또 어떤 사람들은 화투패를 돌렸다.

포항 여객선터미널에서 울릉도로 가는 썬플라워호.
포항 여객선터미널에서 울릉도로 가는 썬플라워호.

3시간 40분의 항해는 모처럼 만끽하는 휴식과 사색의 시간이었다. 클라라 주미 강이 연주한 세자르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으며 책을 읽고, 원고를 교정했다. 나에게는 천국과도 같던 여객선 안이 다른 이에게는 지옥이 되었을까. 너울이 심한 날이 아니었음에도 여기저기 배멀미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혼이 나간 얼굴을 하고 주저앉아 있다가 여객선이 한번 꿀렁거리면 화장실로 달려가 속을 게워내는 것이었다. 귀 밑에 붙인 패치도, 출항 전에 먹은 멀미약도 좀처럼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평소 배에 탈 일이 많은 낚시꾼들은 효과가 확실한 ‘초강력 멀미약’을 구비해 다니곤 한다. 요즘 같은 때에 추천하기 조심스럽지만, ‘아네론’이라고 하는 일본 제품이 있다.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효과는 정말 확실하다. 멀미 때문에 울릉도에 갈 엄두를 못내는 사람이 있다면 권해볼 만하다.

‘멀미 대소동’을 피해 잠시 눈을 붙였다. 이내 뱃고동이 크게 울어 내 옅은 잠을 깨웠다. 오후 1시 30분, 썬플라워호는 울릉도 도동항에 도착했다. 항구에 발을 내딛자마자 왁자한 소리들과 함께 어깨 부대끼는 복작임이 나를 에워쌌다. 숙박업소, 식당, 택시, 렌터카, 투어 상품 등이 저마다 손을 흔들며 “이리 오이소” 소리쳤다. ‘먹고사는 일’의 그 활달한 힘 앞에, 그 숭고한 수런거림 앞에 나는 외지인이 으레 가질 법한 경계심을 풀어버렸다. 마음 빗장이 열린 자리로 현무암처럼 투박하고 거친 사투리들이 날아 들어왔다. 돌덩이 같은 말들이지만 사근사근 마음을 두드리는 묘한 다정함이 있었다. 별 흥정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숙소와 차량을 정해버렸다.

복잡한 일을 비교적 쉽게 처리하자 잊고 있던 배고픔이 발길질을 해댔다. 식당만큼은 발품 팔아 찾아보기로 했다. 골목과 골목들이 얽히고설킨 울릉도 도동을 걷는 일은 마치 미로를 탐험하는 것처럼 즐거웠다. 여행지의 좁은 골목에서는 그곳 사람들의 꾸밈없는 일상과 취향, 아기자기한 생활들을 엿볼 수 있다. 예술작품 전시회장에 온 사람마냥 이리저리 눈을 돌리다가 한 허름한 식당 앞에 멈춰 섰다. 울릉군청 앞에 있는 ‘돌섬식당’은 울릉도의 대부분 음식점들이 그러하듯 따개비칼국수와 따개비밥, 홍합밥, 오징어내장탕 등을 판다. 스테인리스 미닫이문에 주인 부부가 직접 따개비를 따는 모습, 정답게 따개비를 손질하는 모습 등 대문짝만 하게 붙여 놓은 사진이 내 발길을 붙잡았다.

따개비칼국수를 주문했다. 사실 따개비란 것을 처음 먹는 순간이었다. 숱하게 바다낚시를 하며 갯바위에서 밟고 다니던 그 따개비가 음식이 될 거라곤 생각 못했다. 알고 보니 탈모에 좋은 아르기닌이 풍부해 고급 식재료로 각광받는다고 한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먹을거리가 귀한 섬, 척박한 환경에서 섬사람들이 억척스레 찾아낸 식재료라 생각하니 칼국수를 휘저을 때 푸른빛을 언뜻 내비치는 따개비살이 참 귀하게 여겨졌다. 따개비칼국수는 간단하다. 따개비 삶은 육수에 칼국수 면과 애호박, 청양고추 등을 넣고 끓여낸 후 김과 참깨를 고명으로 얹으면 끝이다. 간단한 레시피지만 면과 따개비살을 젓가락으로 집어 후루룩 빨아들이면 갯바위를 때리는 파도의 시원함과 등대불빛의 온기, 푸른 물 내음이 몸속으로 함께 들어온다.

울릉도 도동 ‘돌섬식당’에서 맛보는 따개비칼국수
울릉도 도동 ‘돌섬식당’에서 맛보는 따개비칼국수

소박하지만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다시 도동항으로 향했다. 도동항 여객선터미널과 이어진 행남해안산책로를 걷기 위해서다. 도동항 방파제에서부터 저동 촛대바위까지 이르는 둘레길로 길이는 총 2.6㎞다. 왕복하는 데 1시간 20분쯤 소요된다. 동해에서도 먼 바다인 울릉의 물결은 세상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파랑을 지녔다. 행남해안산책로를 걸으면 발꿈치부터 정수리까지, 혈관을 흐르는 피마저 파랗게 물드는 느낌이 든다. 걸을수록 몸이 가벼워진다. 이 길 위에서 나는 바닷새가 되어 몸이 떠올랐다가 다시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가을햇살로 짠 은빛 비늘의 스웨터를 입었다. 해안산책로에서 가장 탄성을 자아내는 절경은 해식동굴이다. 오랜 세월 동안 파도가 깎아낸 협곡에는 사파이어 빛깔의 바닷물이 쌀 씻는 소리로 차르르, 탬버린 소리로 차르르, 사랑하는 이가 긴 머리를 감는 소리로 차르르 밀려오고 밀려나가며 신비한 음악을 연주한다. 눈과 귀를 모두 사로잡는 해식동굴의 풍경을 SNS에 올렸더니 난리가 났다. 지중해에 있느냐고,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있느냐고, 이런 바다색이 있을 수가 있느냐고 호기심과 부러움, 놀라움을 담은 댓글들이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었기 때문이다.

조금 걷다보니 ‘용궁’이라는 이름의 횟집이 나타났다. 움푹 팬 홈통 지형 빈터에다 테이블을 펴고 생선회와 전복, 오징어, 소라, 멍게 등 해산물을 파는 식당이다. 발밑까지 밀려들어오는 바다의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감촉을 온몸으로 만끽하면서 바다가 키운 해산물로 혀끝의 쾌감까지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이따 저녁에 오이소” 하며 지어보이는 푸근한 미소가 없었더라도 오늘 저녁 식사는 무조건 이곳이라고, 점을 세게 찍어두고는 다시 걸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쓴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대목이 무작정 떠오르는 오후였다. “따사로운 가을날 낯익은 섬의 이름을 외며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쉬 천국에다 데려다 놓을 수 있는 것이어서 나는 좋아한다. 그곳만큼 쉽게 사람의 마음을 현실에서 꿈의 세계로 옮겨 가게 하는 곳은 없으리라.”             /시인 이병철

    시인 이병철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