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영 회사원

“용왕에게 잘 보이려 토끼를 유인했던 동물은? 이적과 유재석이 결성한 듀엣 이름은?” 정답은 거북이와 처진 달팽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부르면 동작이나 판단이 느릴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름은 이런 연상 작용을 한다. 밥을 짓고 집을 짓는 것처럼 이름도 공을 들여 ‘지어서’ 아기에게 붙여준다. 아이 인생이 이름대로 펼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누군가의 이름을 들으면 그 의미를 해석해서 성격이나 삶까지 유추한다.

살면서 나쁜 일들이 연이어 벌어지거나 이름이 특정인을 떠올려 일상이 불편할 때 운을 바꾸기 위해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한다. 이름이 내포하는 힘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개명을 할까? 개명의 역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길다.

10여년 전 고용센터에 경험한 일이다. 미국발 금융위기 때문에 실업급여를 지급하는 곳이 대기자들로 가득했다. 직원들은 민원인 이름을 일일이 육성으로 불러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대기자들 웅성거림은 커졌고 직원들은 그 소리에 호명하는 이름이 묻힐세라 더 크게 소리쳤다. 한참을 그렇게 일을 처리하던 어느 직원이 누군가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더니 황급히 목소리를 낮추어 부르는 것이 아닌가.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후다닥 창구에 가서 앉는다. 그만 그 순간만큼 나는 1만5천㎐를 듣는 돌고래 청력으로 그 이름을 똑똑히 듣고야 말았다. 그 이름은 ‘○백수’. 속뜻이야 참 좋으련만(아마도 만물의 우두머리 정도가 아닐까?) 그 자리에서 불린 이름은 누구나 생각하는 바로 그 의미로 동시에 해석됐다. 하필 이곳이 ‘누구나 생각하는 바로 그 의미’에 해당하는 사람이 오는 장소인지라 난감한 상황이었다. 모인 사람들 처지가 다 같은데도 하필이면 이름 때문에 머쓱해진 것이다. 그 신사분은 나중에 개명했을까?

S는 자기 이름을 참 사랑했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지어주었는데 의미도 좋아서 어디든 이름을 내놓길 좋아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역술인들이 풀이를 해주거나 인터넷으로 풀이를 할 때마다 점수가 낮게 나왔다. 그 이름을 가지고서는 크게 성공을 하지도 못할뿐더러 파도 위 돛단배처럼 언제 좌초될지 모르는 위험한 이름이라는 풀이까지도 나왔다. S는 자신의 이름이 의미도 좋고 부르기도 좋은데 이렇게 근거 없는 미신에 휘둘려 바꿀 생각은 없다고 했다. S는 집이 좀 가난하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것 외엔 특별히 인생이 힘들거나 어려운 일은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S는 30대 중반 항암치료를 받았다. 세 사람당 한 명꼴로 암이 흔한 세상이니 자기가 걸렸다고 해서 특별할 것은 없다고 했다.

1년여 투병을 한 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시 씩씩하게 일을 했다. 그 후에는 이렇다 할 일이 없었는데 40대 초반 외국에 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대한항공 프레스티지석에 누워 이송되어 올 때도 비싼 자리를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게 아쉬웠다고 천진스럽게 얘기했다. S는 다행히 다리만 동강 났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보면 그의 삶이 결코 쉬웠던 게 아닌데 당사자는 괜찮다고 하니 결국 인생은 자기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랬던 S가 얼마 전 암이 재발해 치료를 받고 재수술을 했다. 살면서 암과 교통사고를 몇 차례씩 겪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다. 물론 S보다 더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작은 고난도 연거푸 들이닥치면 힘에 부쳐 무릎을 접게 된다. S는 마음 한쪽에서 인내하며 기다리던 개명의 유혹과 손을 잡았다. 이제는 아름다웠던 옛 이름을 미련 없이 털어낼 수 있다며 고통의 과거는 추억 속으로 내보내겠다고 했다.

개명이 좋다, 나쁘다를 논할 대상은 아니다. 개명을 의지박약의 결과물로 매도할 필요도, 그것에 초연한 것을 대단하다 추켜세울 필요도 없다. 최소한 개명은 이전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름을 바꾸는 행위 하나가 마음에 희망의 씨앗으로 자리 잡아 오늘을 살아낼 힘을 준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S도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나 예전의 그 웃음을 찾았다. 남은 것은 건강을 마저 회복하고 새로 시작한 인생을 행복하게 즐기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