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현재의 삶에서 훌륭한 사람을 찾기는 어렵다. 어딘가에 그런 분들 계시겠지만 텔레비전,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가히 모래밭에서 겨자씨 찾기다.

이광수에서 안창호로 옮겨가고, 다시 안창호에서 신채호로 옮겨간 끝에 이번에는 백범 김구에 이르렀다. ‘민족의 죄인’ 이광수가 해방 직후에 백범의 일지를 정리하여 ‘백범일지’로 남겼는데, 여기에 얼마나 어떻게 그의 생각이나 판단이 개입해 있는지가 따져볼 일이다.

김구는 해주 사람, 김자겸의 후손으로 양반이 몇 대를 내려온 끝에 상민이 된 집안에서 났다.‘백범일지’에 상민의 자식으로 나서 동학당이 되었다가 명성황후 원수 갚는다 하여 왜인을 처단하고 사형수가 된다. 그럼에도 어떻게 하여 천신만고 끝에 살아날 수 있었는데 그 연유가 흥미롭다. 도스토예프스키만 사형 집행 직전에 살아난 게 아니요 바로 김구 선생이 교수형 집행 직전에 살아날 수 있었던 ‘산’장본인이다. 그때 마침 서울에서 인천까지 장거리 전화가 개통되었다고 한다. 이미 김구 교수형이 결정되어 신문에까지 났다. 고종 황제께옵서 어전회의를 열어 김창수가 왜인을 살해한 것은 국제관계이니 나중에야 어찌 되었든 우선 사람부터 살려놓고 보자고 하셨다. 황제가 직접 전화를 걸어 집행 정지를 명령하였다고 한다. ‘백범일지’에서 김구 선생이 술회한다. 만약 이 장거리 전화가 개통되지 않았던들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이른바 신문명의 참 희한한 혜택도 다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목숨 살아난 김구가 파옥을 하고 무주로 도망쳐 세상 방랑에 들어서는데 어찌나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지, 아하, 큰 사람이 되려면 그렇게 먼 곳을 떠돌아야 하나보다 생각하게 된다.

그런 김구 선생이 공주 갑사쯤 가서 어떤 사람을 만나 마곡사에 스님 되러 간다고, 같이 가서 승려가 되자는 권유를 받고 동행을 하게 된다. 신분을 감추고 이리저리 떠돌아야 하는 신세, 예나 지금이나 절집은 숨어 사는 사람들이 의지하기 좋은 곳이다.

“시간이 지나서 사제 호덕삼이가 머리털 깎는 칼을 가지고 냇가로 나가서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나의 상투가 모래 위에 툭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지난 해에 학생들과 함께 공주 마곡사에 답사를 갔는데, 거기 김구 선생 사진이 크게 붙어 있고 그 옆에 어딘가에 앉았는 사람은 분명 이광수였다. 영웅과 ‘민족의 죄인’이 함께 동석한 희귀한 사진을 오래 쳐다 봤었다.

요즘 삭발이 유행이지만, 그 많은 삭발 가운데 김구 선생의 삭발 같은 삭발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생각해 보게 된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