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교당에서 바라본 병산서원 풍경.
입교당에서 바라본 병산서원 풍경.

서원(書院)은 주자학의 이념을 배우는 조선 시대 사설 교육기관이다. 교회와 기독교, 사찰과 불교의 관계와 같다.

서원은 지방의 공립학교인 향교처럼 과거 급제나 관료 양성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인격의 완성에 목적을 뒀다. 서원이 심신을 수양하기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이유다.

서원에서는 지역의 유교 선현을 기리고 그들의 사상과 학문을 계승할 인재를 키웠다. 도서를 간행해 보관했고, 미풍양속을 장려하고 백성을 교화했다. 서원은 조선 정치·사회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우리나라 서원 9곳이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자,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이 세계유산회원회가 서원을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올린 이유다. 특히 이 9곳은 인격 완성과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고민했던 유학자들의 사상이 구현된 곳이다.

일본의 경제 침략, 북한의 도발, 미국의 압박, 중국과 러시아의 견제 등 각종 위기에 직면한 시기, 선현의 참된 정신이 깃든 9곳의 서원 중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을 찾아가 봤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도산·병산서원’
제향자 직접 짓고 생활한 ‘도산서원’
정문 들어서면 서당과 기숙사 ‘농운정사’
휴식과·강학의 복합공간 ‘만대루’
낙동강 줄기·우뚝 쏟은 푸른 병산
해칠녁 풍광 등 탁 트인 경치 일품

◇ 추로지향의 성인을 찾아가는 길

경북 안동은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불린다. 맹자의 출생지인 추(鄒)나라와 공자의 고향인 노(魯)나라에서 따온 말로, 바로 안동이 유학의 고향이란 뜻이다.

안동은 조선 시대부터 지금까지 유교의 전통이 가장 잘 이어져 오는 곳이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서원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도산서원(陶山書院)과 가장 아름다운 병산서원(屛山書院) 등 두 곳이나 있다.

도산면에는 토계(兎溪)란 이름의 작은 개울이 있다. 개울가 비탈에는 작은 건물 세 채가 복원돼 있는데 이 중 ‘溪上書堂’(계상서당)이란 현판이 걸린 초막은 퇴계 이황(1501∼1570)이 1546년 낙향해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친 곳으로 알려졌다. 퇴계는 개울의 이름에서 따온 ‘퇴계’(退溪)로 호를 삼았다고 한다.

퇴계는 계상서당이 비좁아 제자를 더는 받지 못하자 1560년 산 너머 낙동강 변에 서당을 짓고 살며 후학을 양성했다. 이 도산서당은 퇴계 사후 제자들이 세운 제향(祭享) 영역과 함께 도산서원을 이룬다.

도산서원은 1575년 사액(賜額)서원이 됐다. 사액서원은 왕으로부터 편액(扁額), 서적, 토지, 노비 등을 받으며 그 권위를 인정받은 곳을 말한다.

도산서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9개 서원 중 유일하게 제향자가 직접 짓고 생활한 곳이다.

도산서원으로 향하는 길 한쪽에 ‘鄒魯之鄕’(추로지향)이 새겨진 비석이 놓여 있다. 공자의 77대 종손이 1981년 도산서원을 방문한 것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오른편으로 초록빛 들녘을 배경으로 안동호로 유입하는 푸른 물줄기가 휘도는 풍광을 감상하며 조금 걷자 도산서원 앞으로 커다란 느티나무와 소나무가 그늘을 짙게 드리운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강변 그늘에 강줄기를 향해 놓인 벤치에는 햇살과 더위를 피해 찾아든 방문객들이 시원스러운 풍경을 마주하며 여유를 즐긴다.

벤치 양옆으론 절벽이 강을 향해 돌출해 있다. 동쪽은 천연대(天淵臺), 서쪽은 운영대(雲影臺)라고 부르는데, 천연대는 시경(詩經)의 ‘솔개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연비려천) 魚躍于淵(어약우연)]에서, 운영대는 주자의 관서유감(觀書有感) 중 ‘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돌고 돈다’[天光雲影共排徊(천광운영공배회)]라는 구절에서 인용했다.

강 건너 둥그런 축대 위에는 시사단(試士壇)이란 이름의 비각이 하나 서 있다. 정조는 1792년 퇴계를 추모해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송림에서 과거를 열었는데 응시자가 7천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 비각은 바로 이를 기념해 세운 것이다. 옛 건물과 비는 1974년 안동댐이 건설될 때 지상 10m 높이로 쌓아 올린 축대 위로 옮겨졌다.

도산서원 입구 바로 옆에는 ‘冽井’(열정)이라 새겨진 우물이 있다. 세월의 떼가 덕지덕지한 우물은 도산서당 식수로 사용한 것으로, 아직도 맑은 물이 담겨 있다.

열정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내듯 부단한 노력으로 심신을 수양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병산서원 만대루
병산서원 만대루

◇ 소박한 공간에 담긴 퇴계의 마음

서원은 일반적으로 경사면에 들어선다. 전체적으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은 전저후고(前低後高)의 형태를 띤다. 또 제향 공간은 뒤쪽에, 강학 공간은 앞쪽에 배치된다(前學後廟).

도산서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도산서원은 퇴계가 지은 서당 영역이 맨 앞쪽에 있고, 사후에 세워진 강학과 제향을 위한 건물이 뒤쪽에 배치돼 있다.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서원의 중심 건물인 전교당(典敎堂, 보물 제210호)을 향해 계단이 곧게 이어진다. 정문 바로 오른쪽엔 도산서당이, 왼쪽엔 기숙사인 농운정사가 자리한다. 도산서당의 사립문은 유정문(幽貞門). 은둔하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속뜻이 담겨 있다. 서당 마당에는 연꽃을 심은 작은 연못인 정우당(淨友塘)이 있다. 퇴계는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않는 연꽃을 꽃 중의 군자라고 했다.

서당 건물은 3칸으로 검소하고 소박하다. 오른쪽에 대청인 암서헌(巖栖軒), 중앙에 침소인 완락재(玩樂齋), 맨 왼쪽에 부엌이 있다.

하지만 3칸 집으로 보기는 어렵다. 완락재는 반 칸 정도 크고, 암서헌은 1칸 정도를 늘려 지붕까지 달았다. 공간의 쓰임새에 따라 크기를 달리 설계했기 때문이다.

완락재는 퇴계의 침소이자 독서 공간이다. 한 사람이 겨우 몸을 누일 정도로 비좁다. 퇴계는 부엌 쪽으로 공간을 내어 서가를 마련하고 책 1천여 권을 놓아두었는데 서가 앞에서 잠을 자거나 서가를 등지고 앉는 것을 불경스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제자들이 거처하며 공부한 농운정사는 도산서당 건축 이듬해 세워졌다. 퇴계는 제자들이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工’(공) 자 모양으로 건축했다. 8칸 규모 건물은 정면에서 보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소박한 모습의 도산서당.
소박한 모습의 도산서당.

◇ 풍전등화의 조선을 지킨 정치가

도산서원에서 남서쪽으로 차로 1시간 거리에는 서애 류성룡(1542∼1607)을 기리는 병산서원이 있다. ‘서원 건축의 백미’로 알려졌듯 건축 답사지로 유명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건물이 하나도 없다. 이곳의 가치는 바로 자연환경과의 조화, 평범한 건물들이 이룬 공간과 구조에 있다.

병산서원을 이해하려면 우선 류성룡을 알아야 한다. 서애는 경북 의성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나 이곳 하회마을과 한양에서 성장했다.

퇴계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퇴계는 “마치 빠른 수레가 길을 나선 듯해 매우 가상하다”고 평했다고 한다.

서애는 25세에 관직을 시작해 임진왜란 때는 국난을 수습했다. 서애를 얘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다. 1591년 좌의정이었던 서애는 종6품 정읍현감 이순신을 무려 7계단 높은 정3품 전라도좌수사에 천거했다. 그의 천거는 적중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서애는 병조판서 겸 도체찰사로 전시 정국을 이끌었다. 왜군의 수급을 베어오면 노비를 면천했고, 대동법의 모태인 ‘작미법’(作米法)을 시행했으며, 속오군을 만들어 양반에게도 병역의무를 지웠다.

전란이 끝난 후에는 하회마을에 은거하며 임진왜란의 원인과 전황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지난 일을 경계해 후환을 삼가라는 뜻이다. 이렇듯 그는 뛰어난 정치인이자 학자였다.

병산서원은 가파른 병산 절벽이 앞을 막고 낙동강 줄기가 휘도는 곳에 자리한다. 병산서원 정면에 서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마침 서원을 향해 열을 지어 선 배롱나무가 붉은 꽃망울을 터뜨려 화려함을 더한다.

서애는 1572년 병산서원의 모체인 풍산읍의 풍악서당을 이곳으로 옮겨왔다. 풍악서당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1607년 재건됐다. 풍악 서당이 서원으로 바뀐 것은 1614년 서애의 위패를 모시면서부터다.

대칭을 이루는 농운정사.
대칭을 이루는 농운정사.

◇ 숨 멎을 듯 아름다운 자태

팔작지붕을 얹은 3칸 정문인 복례문(復禮門) 뒤로 만대루(晩對樓)의 기와지붕이 가로로 넓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진초록의 화산 줄기가 너울거린다.

복례는 논어의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에서 따온 것으로,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라는 뜻이다.

복례문을 지나면 왼편으로 광영지(光影池)란 이름의 연못이 자리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관에 따라 배롱나무 그늘이 드리운 네모난 연못 속에 둥근 섬을 조성했다. 섬에는 조그만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복례문 정면으로 계단 위에는 둥근 나무 기둥 18개를 세워 올린 만대루가 펼쳐져 있다. 나무 기둥은 휘어진 모습 그대로다. 커다란 돌을 받친 기둥도 보인다.

만대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백제성루’(白帝城樓) 중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마주하기 좋으니’(翠屛宜晩對)란 구절에서 따왔다. 만대루 기둥 사이로 강학 영역이 들여다보인다.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 공간이다. 기둥 사이를 빠져나와 만대루에 오르자 넓은 누각이 시원스럽다. 기둥과 난간을 제외하고 어떤 것도 주변 경치를 가로막지 않는다. 복례문 뒤편으로 낙동강 줄기가 유유히 지나고 그 뒤로 푸른 병산이 우뚝 솟아 있다. 두보의 시처럼 해 질 녘 풍광이 무척 아름답다고 한다.

반대편으론 강학 영역이 정갈하게 내다보인다. 유생들은 이곳에 올라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피로를 풀었다고 한다. 만대루 한쪽에는 북이 걸려 있다. 서원의 금기인 여자, 사당패, 술이 반입됐을 때 울렸다고 한다.

안동/손병현기자 why@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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