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유배자를 통해 본 과거시험 부정 백태(百態)

장기로 가는 길. 길등재를 넘으면 장기천 상류를 따라 뱀처럼 길게 뻗은 굽은 길이 동악산을 휘감아 읍내까지 연결된다. 한때 이 길은 장기로 온 많은 과옥죄인들에게 과거길이 아니라 유배길이 되기도 했다.

과옥죄인(科獄罪人)은 과거 시험에서 부정을 저지른 죄인을 말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시험이 있는 곳이면 부정행위는 있게 마련이다. 조선시대 유배형벌 중 ‘유 3천5백리’에 해당하는 경상도 장기현에는 조선조 내내 과옥죄인들의 유배행렬이 끊어지질 않았다.

과거 제도는 중국 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나라에도 788년 신라 원성왕 때 ‘독서출신과’라는 시험이 있었다. 독서 능력에 따라 상중하 3품으로 나누어 등용하였던 제도이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의 과거는 고려 광종 때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과거 제도는 우리나라 정치 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시대의 과거 과목에는 문과와 무과, 생원과와 진사과가 있었다. 이 밖에 중인들이 보는 잡과에 역관을 뽑는 역과, 의원을 뽑는 의과, 천문 지리를 맡아 보는 음양과와 법률을 다루는 율과 등이 있었다. 이 중에서 문과는 문관의 등용 자격시험으로 가장 중시되어 대과(大科)라고도 하였다. 반면 성균관에 입학자격이 주어지는 생원과와 진사과는 소과(小科)로 불렀다. 문과는 1차 시험인 초시와 2차 시험인 복시가 있었다.

과거제도의 본래 목적은 능력 있는 인재 선발에 있었다. 그런데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험의 공정성이 전제되어야 했다. 조선시대에도 과거시험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는 많았다. 부자(父子), 형제나 가까운 친척이 한곳에서 시험을 치르지 못하도록 시험장을 나누어 운영했고, 응시생이 자신의 친인척일 경우에는 시험관에 임명될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부정행위가 적발되면 해당자들을 먼 변방으로 유배를 보내는 등으로 엄하게 처벌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부정행위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점점 그 수법도 교묘해지거나 대담해졌다. 오죽했으면 “돈만 있으면 어사화도 얻을 수 있다(御賜花耶 金銀花耶)”라는 속언까지 생겨났을까.

과거시험의 절차에서도 부조리를 없애려는 노력이 있긴 했다. 우선 과거 응시자의 자격을 심사해 응시원서를 접수하던 제도를 ‘녹명(錄名)’이라고 한다. 그래서 과거를 보기 위해 수험생들은 먼저 녹명소(錄名所)에 사조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해야 했다. 사조단자는 응시자 및 그 아버지·할아버지·외할아버지·증조부의 관직과 성명·본관·거주지를 튼튼한 백지에 기록한 것으로, 양인과 서얼을 가려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오늘날 일반인에게 알려진 ‘사주단지’라고 하는 것은 본인의 생년월일과 출생한 시각 정도만 기재하고 있는 것으로 ‘사조단자’가 잘못 전해진 것이다. 보단자는 일명 보결(保結)이라고도 하는데, 6품 이상의 조관(朝官·국가공무원)이 서명 날인한 신원보증서이다.

녹명소에서 녹명관은 사조단자와 보단자를 접수한 다음 응시자의 사조 가운데 경국대전에 규정한 결격 사유가 없는가 살펴보고 이상이 없을 때 녹명책에 기입하였다. 특혜를 받은 응시자라 하더라도 녹명하지 않으면 자격이 상실되었다. 만약 녹명에 부정이 있을 경우, 지방의 유향소를 통제하기 위하여 설치한 중앙 기구인 경재소의 해당 관원과 사관원은 파직되고, 응시자는 유배를 가야만 할 정도로 엄격히 다스렸다.

시험장에는 수험생 이외의 출입을 금지시켰다. 수험생들은 시험장 입구에서 필기도구 이외의 책이나 쪽지를 소지하고 있는지를 점검받아야만 했다. 이때 더러는 긴 도포자락에 빼곡히 예상 답안을 써왔다가 잡히기도 했고, 붓두껍에 답안을 숨겼다가 적발된 사람도 있었다. 시험장에 들어가서는 6자(약 1.8m) 씩의 거리를 두게 했지만, 담벼락 밑이나 구석진 곳 등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한 쟁탈전도 벌어졌다. 담장 주변의 장소에 자리를 잡아 하인을 시켜 종이쪽지를 건네받으려는 심보였다.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과거시험장의 모습은 때로는 난장판이었고, 각 당파간의 전쟁터가 되기도 했으며, 부정부패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과거시험 응시의 자격은 천민을 제외하고 농민, 상인, 중인, 양반까지 가능했지만, 현실적으로 생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부에 매달려 과거에 응시하기란 어려웠다. 때문에 과거는 집안 사정이 나은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다. 양반들은 체면 때문에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고, 세도가와 부잣집에서는 출제관에게 미리 뇌물을 바치는가 하면, 문장을 잘 짓는 자와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사서 대신 시험을 치게 하는 등의 방법으로 과거에 합격하기도 했다.

부정부패는 특히 소과(小科)인 생원시와 진사시에서 많았다. 생원시는 유교경전에 관한 지식을, 그리고 진사시는 부(賦)와 시(詩)의 제목으로 문예창작의 재능을 각각 시험하였다. 이 시험 합격자에게는 생원 또는 진사라고 하는 일종의 학위를 수여하였다. 시험은 3년에 한차례씩 정규적으로 실시하는 식년시(式年試)와 국왕의 즉위와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 이를 기념해 실시하는 증광별시(增廣別試)가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의 부정행위 백태(百態)는 과옥죄인이 되어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인물들의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대충 정리가 된다.

1660년(현종1) 1월 22일자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홍익기(洪益祺)란 응시자가 부정행위로 적발되어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그는 현종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국자감에서 실시했던 증광문과의 생원시와 진사시 두 곳에 응시했다. 홍익기는 녹명소에 제출한 응시원서에 마치 자신이 ‘홍익조(洪益祚)’인 것처럼 적었고, 아버지의 이름까지 위조한 사조단자를 제출하여 시험관을 믿게 한 다음 시험장까지 들어갔다가 들통이 났다. 결국 그는 홍익조라는 사람을 대신해 시험을 봐주는 대사(代寫)행위를 하였고, 이를 위해서 사조단자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고치는 녹명(錄名) 조작의 부정행위까지 저질렀던 것이다.

이 일로 과옥죄인이 된 홍익기는 1660년 1월 말경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그 후 1666년 승정원일기에도 장기현에 정배 중이던 유배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6년 이상은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익기처럼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 중에는 과거장 앞에서 시제(試題·시험 제목)에 따른 시권(試券·답안지)을 미리 작성하여 응시생에게 팔아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오늘날로 치면 족집게 강사들이 예상문제와 답안을 미리 작성하여 시험장 앞에서 수험생들에게 판매한 것이다. 1746년(영조 22) 경연 지사(知事) 원경하(元景夏)는 임금에게 “근래에 선비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요행을 바라기 때문에 일종의 글을 파는 무리들이 선비들을 그르치는 일이 매우 많습니다. 이런 폐단을 통렬히 금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하고, 글을 파는 사람들을 고발하였다. 이에 남옥이란 사람이 체포되어 매문(賣文·글을 파는 것)의 죄목으로 황해도 안악(安岳)에 유배된 사례도 있다.

소과에 응시하는 사람에게는 ‘조흘강((照訖講)’이라는 예비시험을 실시했다. 호적 대조를 마친 응시자들에게 소학(小學)으로 강(講)하여 이에 합격된 사람에 한하여 그 증서로 조흘첩(照訖帖)을 주어 초시에 응시하게 했던 제도이다. 여기서 발급한 합격증은 본 시험 응시를 위한 녹명의 절차를 밟을 때 반드시 제시해야 하는 일종의 신분확인증 구실을 했다.

이런 조흘강에 대신 들어가서 강(講)을 본 죄로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사람도 있었다. 바로 평양에 사는 이희태(李熙泰)란 사람이다. 그는 1791년(정조15년) 8월 21일 과옥죄인 신분으로 이곳으로 와 충군되었다. 또 1792년(정조16) 6월 18일에는 류경항(柳景恒)이란 사람이 역시 나이를 속이고 형 대신 조흘강에 들어가서 강을 보다가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정현렴(鄭顯念)이란 사람은 1852년(철종3) 11월 9일, 소과 초시의 한 종류인 합제(合製) 때에 시험장을 어지럽힌 죄로 장기현으로 와서 충군(充軍)되었다. 또 심의경(沈宜慶)은 1880년(고종 17) 4월 27일, 패악한 무리들과 연접하여 서로 답안지를 훔쳐보거나 베껴 쓰다가 역시 장기현으로 유배를 오기도 했다.

 

안동 시사단(試士壇). 도산서원 맞은편에 있다. 1792년 3월에 정조는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을 내려서 이황(李滉)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를 신설하여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시행하고 기념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주변 이 물에 잠기게 되자 축대를 10m 정도 쌓아서 보존하고 있다.
안동 시사단(試士壇). 도산서원 맞은편에 있다. 1792년 3월에 정조는 이조판서 이만수(李晩秀)에게 명을 내려서 이황(李滉)의 학덕과 유업을 기리는 뜻에서 도산별과를 신설하여 이 지방의 인재를 선발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시행하고 기념하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주변 이 물에 잠기게 되자 축대를 10m 정도 쌓아서 보존하고 있다.

문과시험에서의 부정행위는 이런 것만이 아니었다.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거나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 시험관을 매수하여 답안지 내용의 일부 또는 답안지의 번호를 알려주어 채점 때에 참고하게 하는 것, 남의 글장을 훔쳐서 봉내의 성명을 도려 버리고 자기의 성명을 써 넣는 환비봉(換<7955>封), 차술(借述)이라 하여 남의 답안지에 자신의 이름을 써 넣는 경우, 심지어는 시험장에서 난동을 부리는 등 과거장의 부정행위 행태는 당시 양반 사회의 이면과 관료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현장이 되기도 했다.

한편, 시험의 부정행위는 무과(武科)에서도 있었다. 원응상(元應常)이란 사람은 1783년(정조7) 9월 24일, 활쏘기 시험에서 자기 대신 남을 내보내는 부정행위를 하다가 적발되었다. 법에 따라 그는 장기현으로 유배를 와 수군에 보충되었다. 또 1873년(고종 10) 9월 4일에는 김창순(金彰淳)이란 자가 무과선발시험에서 불법으로 과거시험장에 들어가는 간계(奸計)를 부리다가 역시 장기현으로 와 충군되었다.

조선시대 양반은 3대까지는 신분이 유지되었지만, 그 이하 자손 중에서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나오지 못하면 양반 자격이 상실되었다. 그래서 생원이나 진사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가문과 후손의 영예를 위해서도 절실한 소원이었다. 물론, 그들 중 관계 진출을 목적으로 다시 문과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렇지 않고 생원과 진사의 자격만을 원해서 과거를 보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그래서 조선조 양반사회에서 어떤 한 가문이나 지역의 품격을 논할 때는 반드시 그 가문 또는 지역에서 배출된 홍패(紅牌)와 백패(白牌)의 숫자를 따졌다. 홍패는 문무과(文武科)에 급제한 사람이나 잡과에 입격한 사람에게 내어 주는 증서였고, 백패는 생원·진사과 복시 합격자인 생원·진사에게 발급한 합격증서였다. 과거제도의 부정행위가 조선 500년 내내 끊이지 않았던 배경에는 이와 같은 사회 풍조 탓도 컸다.

요즈음 대학입시에서 학교장추천 우선 선발제나 기여입학제도가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재능이 있으면서 초야에 숨어사는 인재 발굴을 위해 천거제를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수시로 있었다. 과거제도가 지나치게 시험성적에만 의존하고 유력한 집안의 자손에게만 유리하다는 평에 따른 대안이었다. 그러나 기본 방향은 시험성적, 즉 실력에 의한 인재 등용이었다.

과거시험은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비록 운영 문란과 늘어가는 합격자 수로 인해 회의적인 의견이 다수 제기됐지만, 선비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최고의 제도로 자리잡는 데는 변동이 없었다.

능력 있는 인재에게 신분상승의 길을 열어주는 시험제도는 지금도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옛날에도 그랬고 현재도 마찬가지겠지만, 시험의 시행에는 반드시 기회균등과 공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야 개천에서도 용이 나기를 갈망하는 민초들에게 장밋빛의 희망이라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