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영지사 대웅전. 영지사는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471에 위치해 있다.

비가 지나간 뒤 숲은 온통 젖어 있다. 도랑물이 콸콸 젖어 흐르고 이끼 낀 부도들도 잿빛으로 젖어 있다. 젖은 나무들이 천년고찰의 일주문을 대신한다.

영지사의 주차장은 키 큰 참나무 숲이다. 세속을 비켜 앉은 무념의 기운이 지배하는 소박한 곳,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싶다. 발 빠른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를 담담히 돌아앉아 고요히 참선하는, 그런 절이다.

영지사는 신라 무열왕 때 의상대사가 웅정암(熊井庵)이라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때 중창하면서 영지사(靈芝寺)로 바뀌었다. 영조 50년에 중수하였다는 유적비와 지금까지 사찰을 지켜 온 주지 스님들의 부도 네 기가 나란히 초입을 지킨다.

가난한 민초들의 등 휜 일생을 말없이 보듬으며 함께 늙어갔을 법한 절간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마중을 나온다. 느릿느릿 한가로운 걸음걸이와 방문객을 맞는 애교가 보통이 아니다. 고양이의 안내를 받는 사이 먼저 온 불자와 차담을 나누던 스님이 인사를 건네 온다. 편안하다. 절도 스님도.

절은 작지 않다. 공사중이라 그런지 숙환을 앓는 노인의 젖은 눈빛 같은 안쓰러움이 묻어난다. 그 중심을 범종각(泛鐘閣)이 지키고 있다. 누하진입식(樓下進入式) 형태를 갖췄는데 현판에는 루(樓)가 아닌 각(閣), 불경 범(梵) 대신 들 범(泛)자를 쓴 까닭은 옛날에 이곳은 물 위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타원형으로 생긴 법고도 특이하고 종을 치는 당목의 나이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운판과 목어, 갖출 거 다 갖춘 범종각이 어딘지 외롭고 허전해 보인다. 시방세계를 깨우치며 지옥중생을 구제한다는 법고는 속울음 삼키듯 안으로 우는 법에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범종각 위를 서성이며 한 때는 찬란했을 영지사의 옛날을 그려본다.

해질녘 절간에서 울리는 타종 소리나 노을을 등에 업고 댕강대는 교회의 종소리는 생각만 해도 엄숙하고 평화롭다. 타종 소리는 종과 당목, 온도와 습도, 절간의 분위기에 따라 그 울림이 다르다. 영지사의 타종소리가 궁금하다. 그리운 것들 떠나보내느라 한철 꽃잎 지듯 아플 것 같다. 쇠줄과 당목을 연결하는 무명천의 낡고 쓸쓸한 눈빛 위에는 얼마나 많은 시간들이 머물다 갔을까.

대웅전 법당문은 굳게 닫혀 있다. 기도하는 불자 대신 여름풀들이 드문드문 앞마당을 지키고 고양이와 강아지가 삼층석탑 주변을 돌며 장난을 친다. 일상적인 그들의 평화가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인간만이 불성을 가진다는 말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린다.

양측 문이 잠겨 있어 조심스럽게 어간문을 열고 들어갔다. 기도하는 불자보다 스님 홀로 예불 보는 시간이 많을 것 같은 작은 법당, 문 여는 소리에 숲과 바람이 먼저 귀를 세우고, 축원을 담은 불자들의 주소와 이름이 천장에 매달려 무심히 바라본다. 이 찰나적 순간에도 계절은 오고 한동안 익숙했던 계절은 또 사라져 갈 것이다.

주지 스님이 가리키는 곳에 작은 악착보살이 줄을 잡고 반야용선에 오르고 있다. 악착(齷齪)스럽다는 강한 말의 이미지와는 달리 귀엽고 천진한 표정이다.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몰입하는 순간만큼은 꽉 찬 비움의 상태임을 말해 주듯이. 흔하게 쓰는 ‘악착스럽다’는 좋은 의미를 가진 절집 용어였던 것이다.

어원은 이렇다. 불심 깊은 한 여인이 극락정토로 인도하는 반야용선에 오르기로 했는데 그만 늦고 말았다. 반야용선을 타지 못해 발을 구르는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밧줄을 내려주자 여인이 악착같이 매달려 반야용선에 오르게 되었다. 용맹정진 수행하라는 뜻으로 악착보살은 그 오랜 세월 법당에 매달려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권위와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성천 주지 스님의 미소는 소탈하다. 삶의 철학도 분명해 보인다. 드러나는 것이 실상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기에 나는 긴장을 놓지 않는다. 차를 마시고 대화를 나누면서도 부질없는 분별심을 습관처럼 즐기고 있다.

그럴수록 스님은 여유롭고 나는 점점 방향을 잃고 미궁을 헤맨다. 고양이 요요가 소리도 없이 잔디밭을 지난다. 그 발걸음과 스님이 닮았다고 생각할 때, 스님이 말씀하신다.

“언행이 실망스러운 스님을 만나면 감정을 소진하지 말고 ‘스님, 초심으로 돌아가십시오’ 하고 마음으로 기도하세요.”

조낭희수필가
조낭희수필가

와르르 아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산사를 찾아다니면 번뇌가 줄어들 거라 믿었던, 어리석음을 위한 송가이기를 바란다. 허탈하다. 처음 출발선 그 자리에서 여태 맴 돌고 있는 나를 보았다. 무욕(無慾)의 가벼움은 멀고도 멀다. 절집을 찾아다닐수록 허기졌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스님이 어떤 분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어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리라. 일상의 진리 앞에서 나는 지나치게 얕았거나 깊었다. 마음과 마음을 드나들 수 있는 바람 한 줄기 내 안에 재워두고 살고 싶다.

낮은 창문을 기웃거리던 은행나무 그림자가 넉넉해지는 오후, 고양이 요요의 몸짓도 느려지고, 젖었던 내 발걸음의 뒤축도 한결 가벼워 온다. 영지사는 여전히 돌아앉아 참선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