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휘 논설위원
안재휘 논설위원

지금은 거의 잊혔지만, 지난 1992년 이탈리아에서 열혈 검사들이 주도해 일어난 마니풀리테(Mani Pulite 깨끗한 손)라는 이름의 부정부패추방 운동은 세상을 놀라게 한 사건이다. 안토니오 디 피에트로 검사의 본격적인 수사로 시작된 마니풀리테 결과, 1년 동안 고위공직자와 정치인 등 무려 3천여 명의 정·재계 인사가 체포·구속됐다. 전 국회의원의 4분의 1가량인 177명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이 사생결단에 나선 듯한 결기로 날카로운 칼끝을 장관후보자 조국에게 겨눈 일을 놓고 상대적으로 더 많이 놀란 쪽은 여권(與圈)인 듯하다. 청와대와 행정부, 더불어민주당이 분을 참지 못하는 표정이다. 청와대 일부 관계자는 ‘미쳐 날뛰는 늑대’라는 극단적 수식어까지 동원해 “내란음모 사건이나 전국 조직폭력배를 소탕하듯 한다”며 검찰을 비난했다. 여당 의원들도 앞다투어 검찰을 힐난하고 있다.

검찰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대검 관계자는 “수사 개입 우려가 있는 매우 부적절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며칠 전만 해도 윤석열을 ‘사상 최고의 검찰총장’이라던 여권 인사들이 같은 입으로 ‘반란’이라고 욕하는 게 말이 되나. ‘검찰 개혁’을 위해 조국을 내세웠다는 말이 진심이라면 ‘사전보고 안 했다’고 화를 내선 더더욱 안 된다.

‘죽은 고기만 먹는 하이에나’라는 치욕적인 오명을 걸머졌던 검찰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민심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가 관심거리다. 윤석열 총장은 바야흐로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자신의 멋들어진 발언이 참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검찰 개혁’에는 크게 두 개의 과정이 있다. 그 1단계는 ‘정치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이다. 2단계는 시대에 맞지 않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력독점을 해소하는 일’이다. 기본적으로 ‘검찰 개혁’은 법무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국은 법을 개정해야 될 일이라 검찰의 공감 아래 입법부 국회가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역대 정권이 줄줄이 ‘검찰 개혁’에 실패한 것은 선거 때 득표를 위해 공약했다가 막상 정권을 잡고 난 뒤 ‘사냥개 부리는 재미’에 흠뻑 빠져서 약속을 뒤집은 탓 아닌가.

‘어쩌면 윤석열은 문재인 대통령의 제1 충신일지도 모른다’는 분석도 있다. 민심의 흐름을 역행하면서 문 대통령을 ‘망하는 길’로 몰고 가는 청와대 참모들과 정부·여당에 대해서 의미 있는 반기를 들고 있다는 추리인 것이다.

이제 욕심을 좀 더 부리고 싶다. 윤석열이 그보다 훨씬 더 큰 가치, ‘이 나라의 부정부패와 불공정을 일소하기 위한 일대 설거지’에 나선 감동적인 혁신가였으면 좋겠다. 감동적인 한국판 마니풀리테를 볼 수는 없을까. 민심 지지를 바탕으로 검찰 개혁의 1단계인 집권세력으로부터의 독립만 철저히 실현할 수만 있다면 못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명실공히 ‘국민 검찰’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 싶은 기대가 부질없는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