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도(風流道)
신라의 청년들을 찾아서 ⑩

신라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화랑을 형상화한 조형물.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신라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화랑을 형상화한 조형물.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신라와 신라의 역사를 ‘천일야화(千一夜話)’ 속 이야기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또는 육중한 스위스 비밀 금고에 비유하자면 ‘풍류도’와 ‘화랑’은 비밀의 동굴을 여는 주문이나 정교하게 제작된 열쇠라고 할 수 있다.

풍류도와 화랑이라는 2가지 핵심어는 역사학자와 철학자, 예술가와 종교학자가 1천500년 전 서라벌의 사회 구조와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 인식을 추정해볼 수 있는 주요한 수단이 돼 왔다.

그렇기에 화랑과 풍류도에 관한 연구는 21세기에 이른 오늘날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여러 가설과 학설들이 충돌하고 있고, 새롭게 등장하는 학문적 성과에 대한 갑론을박 역시 여전히 뜨겁다.

풍류도의 정의와 성격, 화랑의 등장 배경과 역할 등이 모두 마찬가지.

이런 가운데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제16권 ‘신라의 언어와 문학’은 비교적 현대적 문장으로 쉽게 ‘풍류도’에 대해 풀어 쓰고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아래와 같은 대목이다.
 

풍류도의 실천은 철학가, 종교가, 예술가, 여행가의 삶을 원융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적·인격적 수행과 음악의 절제된 조화와 몸을 움직여 떠나는 원족을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이 이법(理法)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

◆ 풍류도는 무엇이고, 그 핵심 사상 어디서 왔을까

“신라는 공통의 문어인 한자와 공통의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였다. 동시에 유교와 도교도 수용했다. 최치원 같은 이는 당나라 유학생으로 유·불·선 삼교를 아우른 대사상가가 됐다. 최치원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는 유·불·선 삼교를 담고, 나아가 더 높은 뜻을 지닌 현묘지도(玄妙之道) 풍월도의 전통이 내려온다’고 했다.”

풍류도의 개념적 정의를 내린 이 책은 이어 풍류도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추측해 알려준다. 계속해서 읽어보자.

“풍류도의 실천은 철학가, 종교가, 예술가, 여행가의 삶을 원융적으로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적·인격적 수행과 음악의 절제된 조화와 몸을 움직여 떠나는 원족을 통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 이 이법(理法)을 깨닫고 실천하는 것이 풍류도의 요체라고 하겠다.”

위에 언급한 것들의 연장선에서 사학자 김태준의 논문 ‘화랑도와 풍류정신’도 눈여겨 살펴볼 가치가 충분해 보인다.

다음에 인용하는 서술은 보다 구체적으로 풍류도의 목적과 지향점에 접근하고 있다. 동시에 화랑과 풍류도가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언급하고 있기에 다소 길지만 그대로 옮긴다.

“풍류정신(풍류도)은 복잡한 성격을 가진 개념이다. 그것은 원만하고 초탈한 인격을 향한 도의에 제일 목표가 있으면서, 가무로 서로 즐기고 산천을 노니는 예술과 순례의 훈련 목적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러면서 종합적으로 유·불·선의 삼교를 모두 갖추어 가진 정신 개념이었다.

풍류를 살린다는 화랑도의 제일 목표는 나라를 세울 도의를 가진 사람을 훈련하는데 있었고, 그 도달점은 삼교를 포함하는 민족 전통의 정신을 재건하는데 있었다. 사람은 물론 자연까지도 감동시킬 인격의 수양, 신(神)과 사람을 화합시키는 가무의 즐거움, 그리고 산천을 노닐며 먼 곳까지 이르지 않는 곳이 없었던 국토순례의 종교적 경지를 재건하고자 하였다.”

풍류의 도(道)를 세워 전통적 민족정신을 재건하고 끊임없이 몸과 마음을 닦아 6~7세기 신라의 중추가 된 화랑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펴낸 책 ‘신라사 총론’에는 화랑 탄생의 전후 과정이 실려 있다.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해 줄 서술이다.

화랑과 그들이 지향했던 풍류정신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화랑과 그들이 지향했던 풍류정신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돼야 할 것이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화랑은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맡았던 것일까

“국가 운영에서 중요한 부분의 하나는 능력 있는 인재를 발굴해 양성하고, 이들이 활동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인재 양성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신라가 국학이라는 교육기관을 제도화한 것은 7세기에 들어서였다.

그러나 국학 설립 이전에도 인재의 양성 작업은 이루어졌다. 그 기능을 담당한 것이 바로 화랑도(花郞徒)였다. 화랑도 창립의 목적은 지인(知人)에 있었다. 즉 능력이 있는 인재를 발굴하여 이를 관료로 등용하는 것이었다.

신라는 4세기 중엽 이후 중앙 집권력을 강화해 나갔고, 6세기에 우경(牛耕·소를 이용한 농사)의 장려 등으로 생산력을 높였으며, 군현제를 실시함으로써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이 점차 해체돼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국가에 충성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화랑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인간이건 사물에 관해서건 ‘수단’은 ‘필요’에 의해 탄생된다. 화랑이라는 수단은 당대 신라의 정치·사회적 권력을 가진 왕과 귀족들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정황 분석만으로 화랑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을 터. 신라사와 화랑을 연구하는 학자들에 따라 이와 관련된 견해와 주장은 모두 다르다.

역사학자 최광식의 경우는 논문 ‘신라의 화랑도와 풍류도’에서 홍순창(신라 화랑도의 연구), 이종욱(신라 화랑도의 편성과 조직·변천), 이선근(화랑도 연구) 등을 인용해 ‘화랑의 역할 변화 과정’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 설명한다.

“…(전략) 신라의 화랑도는 통일전쟁(7세기) 당시의 상황에선 군사력 강화가 요청된 결과 화랑집단의 군사적 기능이 중시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화랑이 개인적으로 종군한 경우는 있으나, 화랑도가 전사단으로서 조직적으로 참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 이후 통일전쟁이 종식되고 인재 양성을 위한 수련 활동에 참여해 골품체제를 익히는 사회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고 보기도 했다.

신라 하대에는 사회가 불안정하여 화랑제도가 해이해지기 시작해 ‘세속오계’의 이념이 망각되고, 명산대천을 유람하며 음풍영월(吟風詠月·바람과 달을 노래하며 흥겹게 즐김)에 도취하는 유흥과 향락으로 흘러버리게 되었다고도 보았다. (이런 학설들은) 대부분 특정 시기의 특정한 측면만을 부각시켜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아직 명확한 정의가 내려지지 않았기에 “사상, 혹은 이념 체계다” “종교의 한 형태다” “화랑도와 동일, 또는 유사한 개념의 단어라고 보는 것이 옳다”는 각종 주장들이 맞서고 있는 풍류도는 물론이거니와 화랑의 개념과 역할, 활동 영역에 관해서도 학설은 분분하다. 솔직히 말해 갈피를 잡기 어렵다.

현재는 신라의 역사, 화랑, 풍류도에 궁금증을 가진 대중들을 위해 적지 않은 역사학자와 철학자들이 명료한 해석을 내놓으려 노력하고 있는 단계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라사 총론’ 집필에 참여한 학자들 역시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 이제 그들이 연구·해석한 ‘화랑의 역할’ 3가지를 살펴보자.

◆ 지속돼야 할 ‘풍류도’와 ‘화랑’에 대한 연구

첫 번째는 화랑도가 신라의 신분 제도였던 ‘골품제’의 경직성을 완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런 대목이다.

“화랑도는 혈연주의를 벗어나 자신들의 의사에 의해 결성된 일종의 결사체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화랑도의 중심은 진골 출신의 화랑이었지만 낭도들은 두품 출신은 물론 평민 출신 청소년도 될 수 있었다. 이 청소년들은 신분의 제약에도 공동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동고동락 하였다. 그래서 화랑도가 해산된 이후에도 이들의 유대관계는 지속되었다. 그 결과 화랑도는 신분제 사회에서 발생하기 쉬운 알력이나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데 기여하였다.”

‘신라사 총론’이 지목하는 화랑의 두 번째 역할은 풍류도와 관련된 것이다. 서술은 이렇게 이어진다.

“화랑도는 풍류도를 추구하였다. 풍류도의 내용은 최치원이 ‘난랑비서(鸞郎碑序)’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유교·불교·선교 삼교를 포함하였으며,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었다. 이 풍류도의 시작은 늦어도 진흥왕 시기에 이루어졌다. 진흥왕은 불교를 깊이 신앙했고, 신선을 좋아했으며, 효제충신(孝悌忠信)을 국가를 다스리는 요체로 삼았다. 진흥왕의 사상에 유·불·선 삼교의 내용이 모두 포함돼 있는 것이다. 이는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와 동일하다. 화랑들은 신라 고유의 이 풍류도를 배우고 이의 실현을 통해 국가사회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 책이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것은 문무(文武)에 예술적 심미안까지 고루 갖춘 청년의 탄생 과정이다. 신라·백제·고구려 삼국 사이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엔 강인한 정신력과 무예를 갖춘 젊은이가 필요했다. 그 시기 화랑도가 추구한 제1의 목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부연이 붙는다.

“화랑들의 강인한 정신력은 유·불·선에 대한 교육, 즉 도의 연마를 통해 배양됐고, 무예와 체력 단련은 유오산수(遊娛山水)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가악(歌樂)을 통해 화랑과 낭도, 낭도와 낭도 사이의 결합과 단결을 도모하였다.”

재차 말하는 것이지만 풍류도와 화랑에 관한 학문적 주장은 다양하고도 복잡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탐구’라는 후대에 맡겨진 과제를 소홀히 할 수는 없는 법. 앞으로도 보다 많은 관련 분야 학자들의 지속적인 연구와 신라사에 관심을 가진 선후배 기자들의 열정적 취재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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