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광해군 복위운동과 류백수

장기읍성 동문지. 이 곳에는 조해루란 누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흔적만 있다. 우암과 다산을 비롯한 뭇 유배객들과 장기를 방문한 시인묵객들이 여기에 올라 일출을 보며 희망을 다졌던 곳이다.

1628년 (인조6) 2월 4일, 인조가 반정으로 왕권을 잡은 지 6년이 될 무렵이었다. 설명절 분위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류백수(柳栢壽)라는 낯선 사람이 고을에 들어섰다. 절충장군(정3품 무관)이었던 그는 그냥 몸만 온 것이 아니라, 최근 몇 년간 한양에서 회오리쳤던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까지 짊어지고 왔다.

이야깃거리의 실마리는 광해군이었다. 선조는 한참 동안 정비 소생의 아들이 없었다. 대신 후궁 출신 사이에서만 13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 중 공빈김씨(恭嬪金氏)와의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광해군이다. 여러 가지 여건으로 봐서 그가 왕이 될 확률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도성과 백성들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란을 가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분노로 들끓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선조는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자신이 포기한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했다. 광해군은 난중에 의병들을 모아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백성들의 명망을 한 몸에 받았다. 광해군의 왕위계승권은 요지부동할 것 같았고, 그 자신 또한 좋은 임금이 되기 위한 자질을 키워 나갔다.

그런데 사달이 났다. 중전인 인목대비가 뒤늦게 영창대군을 낳은 것이다. 불행의 씨앗은 여기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조정에는 신하들이 어떤 왕자를 지지하느냐를 두고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 대북은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세자였던 광해군을 지지했으며, 소북은 유영경(柳永慶)을 중심으로 적자인 영창대군을 지지했다. 선조도 이제는 마음을 바꿔 영창대군을 왕으로 앉히려 했다. 그러나 결말을 짓지 못한 채 선조는 죽었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광해군이 조선의 15대 왕이 되었다. 아무리 적자라도 겨우 두 살배기인 영창대군이 왕이 된다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날개를 단 대북 정권은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칼을 빼들었다. 이들은 광해군이 임진왜란 때 분조(分朝)를 이끈 공이 있음에도 선무공신으로 책정되는 것을 방해한 것, 선조가 병이 위중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는 것을 방해한 것 등을 이유로 유영경을 비롯한 영창대군 지지 세력들을 공격했다. 유영경은 결국 삭탈관작 되고 유배를 가서 죽었다. 이를 시작으로 소북의 여러 인사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그러나 광해군에게는 또 다른 산이 버티고 있었다. 이제는 명나라에서 즉위를 반대한 것이다. 장자인 임해군이 있는데 어떻게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를 차지했냐는 것이었다. 임해군도 이에 동조하여 동생인 광해군이 자신을 밀어내고 왕이 되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에 대북파들은 우선 임해군부터 모반대역죄를 씌워 강화로 귀양 보내고, 그와 관계된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다 죽였다. 유배를 간 임해군은 얼마 후 유배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이후에도 진릉군, 능창군 등의 왕족들이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죽어나갔다. 왕자와 왕족들이 여럿이 제거되었지만, 대북파들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영창대군이었다. 적자인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정통성 논란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일어난 것이 ‘칠서(七庶)의 옥’이다. 이 사건은 대북파가 영창대군과 그의 어머니인 인목대비까지 한꺼번에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다. 1613년(광해군 5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했던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이때의 범인들은 서인(西人)의 거두로서 영의정을 지낸 박순(朴淳)의 서자(庶子) 박응서(朴應犀)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 달래는 상소를 올린바 있었는데 거부당했다. 이에 불만을 품고 범죄단체를 조직하여 전국을 무대로 화적질을 일삼다가, 문경새재에서 한건 하고 붙잡힌 것이었다.

광해군 무덤.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낮은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엄연히 조선의 15대 왕이었음에도 왕릉답지 않게 규모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비석에는 총탄 자국도 군데군데 있어서 보는 이들을 더 서글프게 한다.
광해군 무덤.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 낮은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엄연히 조선의 15대 왕이었음에도 왕릉답지 않게 규모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비석에는 총탄 자국도 군데군데 있어서 보는 이들을 더 서글프게 한다.

오늘날로 치면 이른바 특수강도 살인사건인 것인데, 대북파의 중심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꾸몄다. 포도대장 한희길(韓希吉)은 박응서에게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연루되었다고 거짓 자백을 하면 목숨만은 건져 주겠다고 꾀었다. 결국 박응서는 김제남은 물론 영창대군과 인목대비까지 역모에 가담했다며 광해군에게 상소를 올렸다. 그 파장은 대단했다.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해서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 받았던 신흠 등 7명의 대신과 이정구 등 서인(西人)세력 수십 명이 하옥됐다. 또한 이 사건의 추국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양어머니인 의인왕후의 능에다 무당을 보내 저주했던 일까지 발각되었다.

곧바로 영창대군을 처단하라는 삼사와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김제남은 임금이 내린 독약으로 스스로 죽었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했다. 이제 겨우 여덟 살인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로 유배되었고, 곧바로 강화부사 정항(鄭沆)의 손에 죽음을 당했다. 임해군에 이어 영창대군까지 살해되면서 광해군은 형제들을 죽인 패륜의 멍에를 쓰게 되었다. 이게 계축년에 일어났다 하여 ‘계축옥사’라고 한다.

한편, 아버지에 이어 어린 자식까지 잃고 슬픔에 빠진 인목대비는 경운궁에 홀로 남겨진 채 사실상 연금 상태로 지냈다. 그런 와중에 경운궁에서 임금을 비방하는 내용의 익명서가 발견됨으로써 인목대비 폐비와 폐모(廢母)에 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1월, 마침내 인목대비는 폐비되어 서궁(西宮)에 유폐되었다. 대북은 폐비에 반대한 인사들인 서인(西人)들에게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지만, 이항복처럼 끝내 폐비·폐모론에 동조하지 않다가 피해를 본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이항복은 북청(北靑)으로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는데, 귀양 가는 길에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표현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란 시조가 유명하다.

광해군은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이런 대북파들의 전횡을 묵과했다. 스스로 반정의 불씨를 키운 셈이었다. 그 불씨에 불이 붙은 것은 1623년 4월 11일이었다. 이서, 이귀 등을 주축으로 한 서인(西人) 반정군이 창덕궁에 들이닥쳤다. 반정의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던 광해군은 그제야 후원문(後苑門)을 통해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곧바로 붙잡혔다. 집권세력이던 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이 처형되었고, 200여 명이 유배되었다. 이렇게 하여 광해군과 대북 정권은 끝이 났다.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이 능양군(綾陽君)을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16대 왕 인조다. 그래서 이를 인조반정이라 한다.

광해군은 문성군부인 유씨, 그리고 폐세자 이지(李祗)부부와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 그해 7월, 이지는 위리안치 된 집에서 땅굴을 파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붙잡혀 인조의 명에 따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장면을 나무위에서 목도한 며느리 폐빈 박씨도 남편이 체포되는 것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 부부를 잃은 충격으로 폐비 유씨 또한 세상을 하직했다.

혼자 남은 광해는 인조반정 이듬해인 1624년, 다시 태안으로 옮겨진다. 표면상의 이유는 그해 일어난 이괄(李适)의 반란군과의 내통에 대한 우려였다. 여기서 잠시 당시의 조선과 중국과의 미묘한 외교적 갈등을 살펴야 한다.

명나라가 서서히 세력이 약해지자, 1616년 만주에서 여진족이 후금(청나라)을 건국했다. 광해군 시절에는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명·후금·조선 세 나라가 아무런 마찰이 없이 지냈다. 하지만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금나라를 배척하는 ‘향명배금(向明排金)’정책을 표방했다. 따라서 명나라를 정벌하려고 준비하던 후금으로서는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정복해야만 후환을 없앨 수 있었다. 또한 후금은 심한 물자부족에 시달려 이를 조선으로부터 교역을 통해 얻어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때마침 반란을 일으켰다가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의 잔당들이 후금 태종에게 광해군은 부당하게 폐위되었다고 호소하고, 조선의 군세가 약하니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결국 1627년(인조5) 1월, 후금이 조선을 침입했다. 정묘호란이었다. 이 전쟁에서 조선은 졌다. 후금은 조선과 형제국이 된다는 맹약과 종실인 원창군(原昌君)을 인질로 잡아가는 조건의 정묘조약(丁卯條約)을 맺고 난 다음에야 철수를 했다.

인조의 정묘호란 패배는 안 그래도 군적법(軍籍法)과 호패법 시행 등으로 동요하고 있던 백성들에게 실리외교를 택한 군주 광해군을 떠올리게 했다. 이때를 놓칠세라 권력에서 밀려난 대북파 잔존 세력들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 중 유효립(柳孝立)은 이 기회가 광해군을 복위시키는 적기라고 판단했다. 유효립의 아버지 유희견은 광해군의 첫째 처남이었지만 일찍 죽고 없었다. 하지만 살아있던 숙부 유희분(柳希奮)과 유희발(柳希發)은 인조반정 당시 참형을 당했고, 당상관 승지로 있던 유효립은 제천으로 유배를 가 있던 유배인의 신분이었다.

유효립은 궁내사람들과 짜고 궁중에 들어가 인조를 살해하고,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의 실행을 위해 그는 먼저 계룡산으로 천도하는 것과, 인성군이 왕이 되는 것이 천명이라는 비결을 유포함으로써 세력을 규합했다. 아울러 몰래 가마를 타고 서울로 가서 전 세마(洗馬) 허유(許<900C>) 등과 모의하고, 도감초관(都監哨官) 윤계륜(尹繼倫) 등 정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과 결탁하는 한편, 궁궐의 내시와 대궐문의 수문장까지 포섭을 했다. 이들은 1628년(인조6) 1월 4일 대궐문을 열고 임금의 침전에 곧장 들어가기로 작전을 짜고,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몰래 잠입하려는 찰나였다.

그러나 이 일은 하루 전인 1628년(인조 6) 1월 3일, 죽산에 사는 전 부사 허적의 고변으로 탄로가 나버렸다. 난을 기획한 유효립 등 관련자 50여 명은 모두 잡혀 처형되었다. 반면 공을 세운 허적 등 11명은 영사공신(寧社功臣)에 책봉되었다.

제주도에 남아있는 광해군 유배지 터. 광해군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 태안에서 제주도로 이배되었다가 1641년에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제주도에 남아있는 광해군 유배지 터. 광해군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 태안에서 제주도로 이배되었다가 1641년에 이곳에서 사망하였다.

비극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위 사건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역모 관련자와 광해군이 밀지를 서로 주고받았고, 광해군이 강화에서 인성군과 연락하여 집의 하인들을 모아 군사로 삼았던 사실이 탄로나게 되었다. 유배인들끼리 서로 서신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범행을 계획했던 것이 밝혀진 것이다. 따라서 경비를 철저히 이행하지 않은 책임자들에 대한 문책이 있었다. 류백수(柳栢壽)는 당시 중추부(中樞府) 당상관(堂上官)인 첨지중추부사로서 이들의 경비를 맡은 책임자였다. 그는 경비를 철저히 하지 않았다는 죄로 복위운동에 참여한 사람들과 똑같이 죽임을 당할 처지까지 왔다. 하지만 전에 쌓았던 공을 참작하여 인조는 그를 죽이지는 않았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를 보냈던 것이다.

이런 경위로 장기에 온 류백수는 3년 동안 이곳에서 머물다가 1631년(인조9) 5월 22일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우리나라 역대 왕들 가운데 광해군 만큼 극과 극의 상반된 평가를 받는 제왕도 없다.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폐위시킬 때 열거한 죄목들을 보면, 그는 불효자였고, 왕자와 왕족들을 죽인 불목(不睦)한 왕이었다. 또 오랑캐인 후금(청)과 교류를 하였으며,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여 민생을 도탄에 빠뜨린 폭군으로 매도되었다. 반면 중국의 명·청 교체기의 어려운 국제적 상황에서 ‘중립외교’ 또는 ‘실리외교’의 노선을 펼쳐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도모했던 탁월한 군주로 재평가되기도 한다.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었던 광해군의 실리외교 노선이 실패한 정책이었는지 성공한 정책이었는지는 곧 바로 판가름이 났다. 광해군과는 달리 반정 인사들이 취한 후금배척정책은 정묘·병자호란이라는 커다란 전쟁으로 되돌아 왔고, 인조가 삼전도의 그 꽁꽁 얼어붙은 맨땅에서 오랑캐의 왕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아홉 번이나 처박으며 항복을 해야만 했던 치욕을 낳았던 것이다. 광해군이 성실하고 과단성 있게 정사를 펼쳤으나,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된 임금으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역사는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현재는 모두 과거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과거의 역사를 알지 못하면, 현재의 이 상황도 설명할 수가 없다. 역사는 지나가버린 과거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지배하는, 살아있는 현재인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