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
신희선 숙명여대 기초교양대학 교수·정치학 박사

“학내 청소노동자도 엄연한 학교의 구성원이다.” 서울대 청소노동자가 휴게실에서 숨졌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보도되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 구석에 청소노동자들의 휴게실이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폭염에 창문도 없는 벽에 선풍기 한 대만 매달려 있었다. 청소노동자들은 손 선풍기를 목에 걸고 폭염을 견디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열악한 휴게실 환경은 서울대학교만의 일은 아니다. 캠퍼스 곳곳에서 수고로운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청소노동자들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공간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보여준다. 로널드 아들러는 우리가 공간을 이용하는 방식은 힘과 계급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일터, 방, 집, 우리가 권리를 갖는 물리적 공간은 모두 우리의 영역이다. 영역은 고정되어 있다.” 권력이 클수록 공간은 넓어지고 성역화된다. 군대만 보더라도 일반 병사는 한 막사에서 자고, 장교는 개인 방을 갖고, 장군은 정부가 제공하는 집을 배정받는다. 이처럼 더 큰 영역과 사생활을 허용하는 공간은 위상에 비례한다. 공간을 통해 권력과 지위를 드러내고 구분짓는다.

대학 캠퍼스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 내 위계구조에 따라 공간 격차는 당연시된다. 교수 연구실조차 정년과 비정년에 따라 다르다. 학생들을 더 많이 만나는 교육교수지만 비정년인 경우 공동연구실을 배정받는다. 학생들이 오면 장소를 찾아 이동해야 하고, 방학에는 상담실이 비어도 공동으로 비좁은 연구실을 감수해야 한다. 대학내 공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구분 짓기’에 따라 공간이 있어도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쪽방 같았던 청소노동자들의 쉼터는 이러한 구조를 반영한 것이다.

비정규직 청소노동자들은 대학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 학교 본부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투명인간처럼 존재한다. 어디에 이들의 휴게실이 있는지 대부분의 대학 구성원들은 알지 못한다. 문패도 없는 허접하고 불편한 공간에 잠시 몸을 내려놓을 뿐이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서울대 청소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을 보며 ‘6411번 버스라고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노회찬의 연설이 떠오르는 이유다.

“무관심이야말로 최악의 태도다.” 스테판 에셀은 최상위와 극빈층 사이의 커져가는 격차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는 일들에 ‘분노하라’고 외친다. 이번 서울대 사태를 계기로 대학 사회는 모든 구성원이 사람답게 살도록 하는데 관심이 있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무엇보다 새벽부터 일터로 나와 고된 노동으로 지친 몸을 잠시나마 쉴 수 있게 제대로 된 휴게실부터 마련해 주어야 한다. 청소노동자를 지하 휴게실 폭염에 노출되도록 방치한 것은 우리의 무관심이 낳은 폭력이다. 미화노동자를 비롯해 대학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따스한 관심은, 공간 변화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공간은 우리 삶의 실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