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의 초상.
멘델스존의 초상.

대문호 괴테(1749∼1832)는 “음악은 모든 예술 장르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음악가들에게는 음악이라는 예술의 형태에 늘 아쉬운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음악에는 구체적인 형태가 없는 것이다. 지금은 음향을 저장하는 매체가 있어 음악을 재생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음악은 연주가 끝나면 실체 없이 증발하는 존재였다. 지금은 주로 생략되어 연주되지만 소나타형식의 제시부가 반복되어 연주되는 것도 1주제와 2주제를 기억해 달라는 작곡가의 소망이었다. 생텍쥐페리(1900∼1944)의 소설 ‘어린 왕자’에서 “꽃이 아름다운 것은 지기 때문이다” 라고 했듯이 음악은 화려하게 피었다가 청중들의 마음속에만 남아있는 꽃과 같았다.

음악에 구체적인 이미지를 도입하고 싶어 하는 소망은 ‘표제음악’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지만 그 이전 ‘무지카 레세르바타’, ‘뮤직 페인팅’, ‘라이트 모티브’ 등 다양한 시도로 나타났으며 19세기 말에 와서는 ‘인상파 음악’으로 그 정점을 찍는다. 인상파 음악이란 쉽게 말해서 순간적인 영상을 음악으로 표현하려는 시도인데 19세기 말 영화가 발명되고 20세기에 유성영화로 발전하며, 구체적인 영상을 위해 음악을 작곡하게 되면서부터 음악의 형상화를 위한 노력들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헤브리데스 군도. 멘델스존 ‘핑갈의 동굴’의 악상이 된 섬.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헤브리데스 군도. 멘델스존 ‘핑갈의 동굴’의 악상이 된 섬.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작곡자는 펠릭스 멘델스존(J.L.F.Mendelsshon·1809∼1947)이다. 필자가 유년 시절 처음 접했던 멘델스존의 음악은 서곡‘헤브리데스(Die Hebridenop.26)’였다. 이 곡은 ‘핑갈의 동굴’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음악은 구체적인 이미지가 느껴지는 곡이다. 거친 바람이 부는 푸른 바닷가에 물새가 날고 있으며, 안개 낀 해안으로 외로운 배를 타고 황량한 섬으로 다가서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멘델스존은 실제 그림 실력이 뛰어나 훌륭한 풍경 수채화 작품들을 남기고 있으며 그 그림은 풍경의 어떤 특징을 나타내기 보다는 자연스럽게 선과 색의 조화를 추구한 작품들이다.

그의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Scottish) op.56’도 이러한 회화적인 기법이 잘 표현된 곡인데 그의 나이 20세 때인 1829년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며 에딘 버러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오래된 예배당에 들러 “나는 믿는다. 내 스코틀랜드 교향곡의 시작 부분을 발견했다….”라고 했다. 이 부분을 보면 멘델스존은 시각적인 느낌으로 악상의 영감을 받은 듯 하며 이 곡의 첫 부분을 들어 보면 그 예배당이 어떤 모습을 하였을지 구체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데 무리가 없다.

멘델스존의 음악은 고정적인 음형이나 화음으로 이미지를 표현하려는 시도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이었으며 관현악에서 여러 악기의 조화로운 음색으로 자연스럽게 나타나기에 더욱 가치가 있다.

멘델스존의 어린 시절은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고달프지 않았다. 전 유럽을 상대하는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오케스트라를 운영할 정도로 부유하였고 가정에서 열리는 음악회에 참석하기 위해 철학가 헤겔, 시인 하이네, 작곡가 시포어, 훔멜 등 당대 예술의 거장들이 집에 자주 왕래하여 그들과 교류하며 당대 최고의 학문과 교양을 쌓았으며, 10살 무렵에 이미 정치가 케이사르나 시인 오비디우스의 책을 원어로 읽었으며 인문학뿐만 아니라 기하학, 수학, 지리학 등에서도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멘델스존은 좋은 환경 뿐만 아니라 다양한 천재적인 지능과 재능을 타고 났으며, 모차르트의 어린 시절과 멘델스존의 어린 시절을 모두 겪은 괴테는 그 둘을 비교하며 “멘델스존에 비하면 모차르트는 혀 짧은 어린애에 불과하다”라며 그의 천재성을 극찬했으며 이러한 특징은 그의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Sommernachtstraum op.21,61-5)’에도 나타난다. 멘델스존은 17세에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읽고 깊게 감명을 받아 관현악 서곡을 작곡하는데 지금도 결혼식의 마지막 행진에 쓰이는 ‘결혼 행진곡(Wedding march)’이 포함된 전곡을 완성한 것은 17년 후인 그의 나이 34세 때이다.

특이한 점은 극음악 ‘한여름밤의 꿈’ 전곡을 감상해 보면 다른 곡들과 서곡의 작곡 연차가 17년의 차이가 난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 부분은 모차르트와 비교해 보면 매우 특이하다. 모차르트는 그의 17세 때의 음악과 30세 이후의 음악을 비교해보면 음악적인 내용이 매우 큰 차이가 난다. 음악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천재 작곡가로 모차르트와 멘델스존을 꼽는다. 모차르트는 ‘음악의 신동’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지만 멘델스존도 ‘19세기의 모차르트’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청소년기 이후 경험했던 세월의 격랑이 달랐다. 모차르트는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과 좌절을 되풀이했으나 멘델스존은 이미 태생적으로만 귀족이 아닐 뿐 최고의 신분에 있었기 때문에 둘의 음악은 확연히 다른 것이다.

멘델스존이 겪은 최고의 고난은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4살 위 누이인 파니 멘델스존을 잃은 것이었다. 둘은 수려한 외모도 닮았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재능도 나눠 가졌다. 아니 오히려 누이인 파니 멘델스존이 더 나은 음악적 재능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훗날 펠릭스 멘델스존은 “누이가 자신보다 더 훌륭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다”고 고백했으며, 나의 ‘칸토르(음악선생님)’라 부르며 따랐다고 한다. 파니는 평생 400곡에 이르는 작품을 썼다고 전해지는데, 당시의 사회 풍조는 여성은 음악을 취미로만 즐길 뿐 전문적인 작곡가가 될 수 없는 풍토였다.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여자가 있을 자리는 살롱”이라며 음악의 길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파니는 작곡가의 길을 포기해야 했으며 그녀가 썼던 6개의 가곡들은 동생의 이름으로 출판되기도 하였다. 이 가곡집에 실린 작품 중 동생의 작품보다 누이의 작품이 더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멘델스존의 누이 파니 멘델스존의 초상.
멘델스존의 누이 파니 멘델스존의 초상.

멘델스존 남매는 음악의 동지이자 서로를 가장 잘 이해 해주는 친구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파니 멘델스존은 1847년 5월 피아노를 연습하다가 손에 감각이 사라지는 걸 느꼈고 그 날 저녁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누나가 죽은 6일 뒤 소식을 들은 멘델스존은 실신했으며 장례식과 추도식에도 참가하지 못하였다. 순탄하기만 했던 멘델스존에게는 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내성이 없었는지, 이후 얼굴이 검게 변하는 등 늙고 등이 굽은 구부정한 모습으로 그의 모습이 추하게 변해 버렸다고 한다.

사랑하던 누이가 죽은 6개월 후 그의 동생 펠릭스 멘델스존도 세상을 떠난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멘델스존의 요절은 많은 안타까움을 준다. 작품도 뛰어났지만 음악사의 발전에 남긴 업적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그는 바흐(1685∼1750)의 ‘마태 수난곡’을 이름 모를 푸줏간에서 누렇게 변색된 채로 발견해 많은 준비를 거쳐 완성된 연주를 함으로써 잊혀졌던 바흐의 음악을 소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20세의 이른 나이에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면서 그 특유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으로 베토벤과 슈베르트 등의 숨겨진 작품들을 찾아내어 연주하였다.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 여름밤의 꿈’을 표현한 회화.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 여름밤의 꿈’을 표현한 회화.

그리고 다른 작곡가와는 달리 그만이 물려받은 경제적인 능력으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음악학교인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한 음악 교육자이기도 한데 이곳은 쿠르트 마주어(1927∼2015), 레오시 야냐첵(1854∼1928) 등의 뛰어난 졸업생들을 배출해 낸 명문 학교이다. 또 환경이 좋지 않은 많은 음악가들에게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모차르트가 35세에 일찍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았더라면 더 많은 걸작을 남겼으리라 아쉬워하지만, 멘델스존의 죽음은 개인을 넘어서 음악계 전체에 큰 손실이었으며 그가 더 오래 살았더라면 잊혀졌던 더 많은 곡들을 발굴하고 외면당했을 음악가들이 빛을 보았을 것이다.

멘델스존은 어렸을 때부터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아야 한다”는 가문의 율법을 몸에 익혔으며 평생토록 습관처럼 그렇게 살아간 사람이다. 그의 인생은 여러 가지 풍요로 가득 했지만 자만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음악을 위하여 무엇인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짧은 생이었지만 평생 동안 노력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음악에는 순수한 시선으로 신이 창조한 위대한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는 경외의 정신이 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