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도(風流道)
신라의 청년들을 찾아서 ⑧

경주시 교동 244번지에 있는 천관사지의 모습. 거의 폐허로 방치되다시피 해 김유신과 기녀 천관의 일화를 담은 그림과 설명, 그리고 복원하다가 만 석탑만이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려준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기원전에 형성돼 10세기 중반까지 길고 긴 세월 동안 존재했던 고대 국가 신라. 시간은 숱한 ‘전설’과 ‘사연’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1천 년 가까이 부침(浮沈)을 거듭했던 나라이니 넘쳐나는 이야깃거리가 있음은 당연한 이치.

예술가들이 그걸 가만히 놓아뒀을 까닭이 없다. 그래서다. 신라를 해석하는 주요 키워드인 ‘풍류도’와 ‘화랑’은 수많은 소설과 시의 소재가 됐고, 영상기술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는 영화와 TV 드라마를 통해 여러 차례 사람들과 만나게 됐다. 이는 ‘역사의 대중화’에도 일정 부분 기여하는 역할을 했다.

영남대학교 조형연구소장을 지낸 민주식의 논문 ‘풍류(風流) 사상의 미학적 의의’는 풍류도가 예술과 불화 없이 결합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자유분방한 정신은 정치나 사회 속에서도 발휘되며, 또 문예나 취미에서도, 이성과의 교제나 호색의 면에서도,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방식에서도 나타난다. 요컨대 환경의 자유로움과 풍격의 고상함을 지닌 자유인의 생활이 풍류이다. 이를테면 은자(隱者)의 생활을 즐기는 일이나 청담(淸談·고상하며 맑은 이야기)에 뛰어난 것이 풍류다…(중략) 풍류는 일상성을 벗어나 개성으로써 새로운 내용을 추구할 때, 일상을 초탈적인 예술의 세계, 혹은 미적 경지로 드높이려 한다.”
 

기녀와 사랑에 빠진 신라 귀족
신분 차이 뛰어넘지 못한 화랑
어린 조카를 죽음으로 내몰며
‘대의명분’ 삼국통일 주역으로
평탄한 삶과는 거리가 먼 생애

◆ ‘풍류’에만 머물 수 없었던 김유신과 천관의 일화

문학, 영화, 드라마 속에서 ‘미적으로 형상화’된 서라벌의 인물들은 적지 않다.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던 화랑 관창과 반굴, 진위 논란이 뜨거웠던 필사본 ‘화랑세기’에 등장하는 신비한 매력의 소유자 미실(美室), 영민했던 승려 원효, 삼국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태종무열왕 등.

이처럼 흥미로운 스토리를 가진 인물들 가운데서도 ‘최고의 주연 배우’는 김유신(金庾信·595~673)이 아니었을까?

통일신라 건설의 일등 공신이었던 그는 ‘비극적인 고대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기생 천관(天官)과의 짧아서 더 뜨거웠던 연애. 그 전말은 아래와 같다.

“젊고 풍채 또한 좋았던 신라 귀족 김유신은 예쁘고 노래 잘하는 기녀(妓女) 천관에게 연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신분과 계급의 차이는 청춘남녀의 사랑을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 김유신의 모친은 ‘집안을 일으키고 세상에 나아가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 매일 기생집이나 출입하고 있으니 내가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며 울먹였다. 어머니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던 김유신. 천관을 향하던 발걸음을 단호하게 끊는다.

그러던 어느 날. 김유신은 동료 화랑들과의 만남에서 대취한다. 그가 탄 말(馬)이 사람의 바뀐 마음까지는 알 리가 없었을 터. 평소처럼 천관이 기거하는 유곽으로 향했던 말. 졸음에서 깨어난 김유신은 망설임 없이 말의 목을 잘라버린다. 천관 앞에서 자기의 뜻이 굳건함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김유신이 떠난 자리에서 한참을 목 놓아 울던 천관은 한 편의 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김유신이 천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천관사(天官寺)를 짓도록 명령한 것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였다.”

이 에피소드에선 좋아하는 이성과의 교제라는 ‘개인적 풍류’와 나라를 보위하고 성장시켜야 한다는 ‘대의명분’ 사이에서 갈등했던 청년 김유신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난다.

김유신은 화랑이었다. 민주식의 논문에 따르면 화랑의 교육 이념으로 정착됐던 풍류도의 주된 내용은 “도의와 미풍을 배우고, 생활에 예술을 끌어들이며, 아름다움을 완상(玩賞·가까이서 즐겨 지켜봄)하는 것”.

그러나, 천관은 ‘가까이서 지켜봐도 좋은 아름다움’이 될 수 없었다. 신라 당대의 사랑은 현격한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지 못했던 것이다.

◆‘대의명분’을 지향함으로써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다

김유신과 관련된 ‘슬픈 죽음’은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역사에 등장한다. 이때의 갈등은 천관을 둘러싼 사랑과 욕망의 절제 사이에서가 아닌, 연민과 전투의 승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책 ‘신라의 삼국 통일’엔 두 명의 소년을 창칼과 화살이 뒤엉키는 사지(死地)로 등 떠밀 수밖에 없었던 김유신의 가슴 아픈 결단이 등장한다. 좋게 말하면 ‘대의명분을 위한 희생’이지만, 거칠게 표현하면 ‘어른들의 이익 다툼 속에서 아이들을 죽인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황산벌전투. 전날 벌어진 결전에서 백제군의 사기에 눌린 신라군은 병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네 번을 싸워 네 번을 모두 패배했다. 김유신은 신라군이 연패를 당하자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김흠순(김유신의 동생)의 아들인 반굴과 김품일의 아들인 열여섯 살의 앳된 화랑 관창을 백제군 진영으로 홀로 보내어 싸우게 했다. 반굴과 관창은 저돌적으로 나아가 싸우다 죽었다. 신라군은 반굴과 관창의 희생을 바탕으로 사기가 진작돼 죽을 각오로 싸웠다.

결국 치열한 접전 끝에 백제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 신라군은 계백과 5천 결사대 대부분의 목을 베고, 충상과 상영 등 20여 명의 장군을 포로로 잡았다.”

이처럼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들 속엔 사랑, 변심, 애틋한 그리움, 회한, 충성, 국가를 위한 희생, 드라마틱한 반전 등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는 키워드가 수도 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에 김유신은 문학과 영화, TV 역사극의 ‘최다 출연자’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만큼 다양한 ‘예술적 변용’이 가능한 흥미로운 인물이라는 이야기.

물론 김유신의 사회·정치적 지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그 당시 신라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때론 비판적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예술의 소재가 된 신라 최고 ‘풍류 화랑’

국문학자 홍성암의 논문 ‘풍류도의 이념과 문학에의 수용 양상’은 ‘풍류의 정신’이 어떤 경로를 통해 예술 작품에 삼투하는 것인지를 이해하기 쉽게 알려주고 있다. 아래 인용한다.

“풍류도가 우리 고유의 이념체계로서 신앙의 성격을 가지는 것이라면, 풍류정신은 풍류도에서 파생된 것으로 문학정신의 한 양상에 가깝다. 따라서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은 대체로 풍류의 멋을 즐기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문학 작품에 스며있는 풍류정신은 다분히 자연발생적인 성격이 강하다. 산천의 아름다움을 즐긴다든지, 노래와 춤을 즐긴다든지, 무병장수와 남녀 간의 사랑을 통해 인생의 현세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들은 멋을 아는 한국인들의 공통적인 의식체계에 속한다고 하겠다.”

위와 같은 학술 논문의 정의에 기대지 않더라도 ‘풍류 화랑’ 김유신의 삶과 죽음은 소설, 또는 영화의 소재가 되기에 충분할 정도로 극적이고 굴곡이 많았다.

‘신라 천년의 역사와 문화’ 연구총서 제22권 ‘신라를 빛낸 인물들’에 따르면 김유신의 생애는 ‘평탄’이라는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느 누구도 쉽게 경험하지 못한 숱한 고난과 난관을 거치며 성장했고, 청년기와 중년기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터지는 살점과 흐르는 피를 보며 보내야 했다.

김유신이 활동했던 7세기는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이 서로의 명운을 걸고 치열하게 항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어느 누구도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김유신은 태생적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눈부신 활약을 보임으로써 새로운 모습의 신라를 만들어간 인물이었던 것. 그랬기에 설원랑, 사다함 등과 함께 ‘미륵의 현신(現身)’으로 숭배 받았을 법도 하다. 다시 앞서 언급한 홍성암의 논문을 살펴보자. 이런 대목이다.

“화랑인 김유신을 따르는 낭도들을 용화향도(龍華香徒)라 했다. 여기서 용화란 미륵보살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서 득도하여 설법을 한다는 불교적 설화에서 기인한 것이다. 미륵보살 신앙은 미래의 밝은 세상을 기약하는 신앙이다. 화랑은 국가의 수호와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던 집단이다. 그리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악을 미워하고 선을 권장했다. 이는 곧 불교적 덕목이 풍류도 속에 용해된 양상이다.”

◆그래서, 김유신은 행복했을까

김유신은 신라를 포함한 한국의 역사 속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이를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살아서는 나라의 미래를 좌우할 ‘미륵’으로 불렸고, 죽어서는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追尊·죽은 사람에게 임금의 칭호를 주는 것)됐다. 어느 왕 부럽지 않은 대접이었다.

일흔여덟까지 살았으니 장생의 복까지 누렸다. 병에 걸렸을 땐 문무왕이 직접 찾아와 위로했고, 사망 후에는 국가 차원에서 천문학적인 부의(賻儀)를 제공했다고 한다.

죽은 뒤 수백 년이 흐른 고려시대에도 거리의 아이들까지 김유신이란 이름을 입에 올렸다니 요즘 표현으로 ‘불멸하는 스타’라고 불러도 무방할 듯하다.

지난 주말이었다. 경주시 충효동에 자리한 김유신의 묘를 둘러보고, 천관사 터가 있는 교동을 향했다.

젊은 화랑 김유신과 예기(藝妓) 천관이 나눈 애처로운 로맨스의 흔적은 시간의 풍화작용으로 인해 사라지고 없었다.

인간이 살고 죽는다는 것의 덧없음을 떠올리며 한참을 그곳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마음속으로 떠오른 뜬금없는 궁금증 하나.

“사랑하는 여성을 버리고, 어린 조카를 죽음으로 내몰면서까지 대의와 명분을 선택한 김유신은 정말로 행복했을까?”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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