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상사화(相思花)가 피어난 걸 보고 여름이 가고 있음을 알겠더라. 따사로운 4월에 이파리가 앞 다투어 무리지어 솟아오르다 어느 사품엔가 시나브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다 8월이 지나 여름도 절정을 넘어설 무렵 홀연히 상사화는 연분홍색 화사하고 처연한 꽃을 피운다. 이파리와 꽃이 나뉘어서 피고 지는 까닭에 상사화 이름 얻었다 한다. 상사화 보다가 200년 전에 메리 셸리가 쓴 소설 ‘프랑켄슈타인’(1818)을 생각한다.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주인공이기도 한 프랑켄슈타인. 그는 불과 열세 살에 의사이자 연금술사인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의 선집을 발견하고 완전히 매료된다. 거기 더해 파라셀수스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의 저작에도 경도(傾倒)된다. 그가 18세기 계몽과 과학의 시간대에 이전시대의 연금술사에게 마음을 뺏긴 까닭은 그들이 불멸과 권력을 꿈꾸었던 대가였기 때문이다. 불가능에 도전하면서 거대한 영화를 실현하려던 과학의 이단아들을 향한 낭만적 존숭.

열일곱 살에 입학한 잉골슈타트 대학의 발트만 교수가 프랑켄슈타인의 운명을 결정한다. “고대과학의 스승들은 불가능한 일을 약속하고 아무것도 실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천재들의 노고는 아무리 오도(誤導)된 것이라도 인류의 선을 공고(鞏固)히 하는데 쓰인다.” 그로부터 2년 뒤 우리의 주인공 프랑켄슈타인은 자타가 공인하는 잉골슈타트 최고의 자연철학자가 된다.

열아홉 살 청년은 창조주(創造主)의 반열에 오르고자 한다. 한낱 인간으로서 야훼나 프로메테우스가 되려는 것이다. 하기야 소설의 원제가 ‘프랑켄슈타인, 혹은 현대의 프로메테우스’인 만큼 이해 가능한 대목이다. 2년 동안의 불철주야 용맹정진 각고의 노력 끝에 프랑켄슈타인은 마침내 무생물에게 생명을 불어넣는데 성공한다. 그의 손에서 피조물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창조물을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다. 너무나 참혹한 형상의 괴물이었기에.

실험결과를 사유하지 않은 채 설익은 젊음의 광기서린 욕망과 의지, 영생과 불사를 향한 미성숙한 과학자의 치기어린 신성(神性)의 갈망이 예기치 않게 괴물을 탄생시킨 것이다. 진선미에 친숙하고 마음 약한 주인공은 도주한다, 추악한 괴물에게서. 도주하고 다시 도망치지만 그는 괴물의 손아귀에서 맴돌고 있을 뿐. 그를 사랑하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괴물의 손에 스러져간다. 종당에는 괴물의 창조주 프랑켄슈타인마저 하릴없이 숨을 거둔다.

그가 남긴 유언의 고갱이는 간명하다. 과학과 발견에서 명성을 얻고자 하는 야심을 버리고 평온함에서 행복을 찾으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친구와 가족, 자연의 변화와 오고가는 사계절, 가정과 고향의 따사로움을 완전히 망각한 채 생명창조에 몰두하다가 참혹한 결과를 도출하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고 자신마저 불귀의 객이 되고 마는 프랑켄슈타인. 필연적인 인과관계 전체를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불행한 자연철학자 프랑켄슈타인. 세월이 흐른 다음에야 프랑켄슈타인은 깨닫는다. 지식획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고향을 세상의 전부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행복한지, 지식추구가 소박한 즐거움과 취향을 파괴한다면 그것은 불법적이고 인간정신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구라 할 것 없이 자연과학 실험과 탐사여행에 몰두했던 18세기 유럽의 광기에 가까운 과학을 향한 집착과 그것이 야기할지도 모를 파괴적인 양상을 빼어난 상상력으로 예견했던 메리 셸리. 21세기 자연과학과 공학과 기술은 ‘길가메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영생 불사하는 인간을 꿈꾼다.

유발 하라리는 호모사피엔스가 종말을 고하고 인간은 호모 ‘데우스 Deus’가 되리라고 예견한다. 프랑켄슈타인이 만들고자 했던 피조물을 넘어서 인간 스스로가 신의 반열에 오르려고 열망하는 21세기 지구촌. 혼란의 한 모퉁이에서 수줍게 얼굴 내민 상사화가 속삭인다. “헛되고 헛되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Vanitas vanitatum omnia vanit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