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곤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김태곤 대백프라자갤러리 큐레이터

현재 대한민국은 36년이라는 일제식민지의 역사를 이겨내고 쟁취한 ‘광복(光復)’이라는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 번 상기해보는 소중한 시간을 경험하고 있다. 조선의 개방정책과 근대화 과정에서 뼈아프게 겪어야했던 식민지 역사와 흔적은 씻을 수 없는 아픔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과 아픔을 통해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는 무엇이며, 치욕과 역경의 역사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정치·경제·국방 등 모든 면에서 갖추어야 할 정도(正道)는 과연 무엇인지 각성해야 할 것이다. 우리 근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모색과 문제점들을 되돌아보며 지금부터라도 새롭게 개선해 나간다면 이번 위기는 분명히 극복될 것이라고 믿는다.

한국사의 근대적 출발점을 1919년으로 본다면 우리 민족은 불합리와 함께 모순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한국 근대사를 경험했다. 더불어 일제의 지배라는 비극 속에서도 민족적 고난과 비애를 강인한 저항정신으로 이겨내며 극복함으로써 새로운 민족적 원동력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했던 시대정신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가져야 할 정신적 가치가 무엇인지 되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미술 분야 역시 진정한 한국적 미의식은 해방과 함께 새롭게 정립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서구의 미술양식과 미학적 요소들은 식민통치를 위한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기 시작해 ‘전통서화’와 ‘서양화’의 갈등과 모순 속에서 우리의 미의식은 서구미술의 형식만을 흉내내는 수준으로 지속되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회화의 근대적 과정은 격동기의 파란만장한 변화 속에서 진정한 가치를 찾기 위해 부단한 노력들이 이어졌다.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숨 가쁘게 진행되었던 한국미술의 주요 사건들을 간단히 살펴보자.

먼저 해방 직후인 8월 18일에 전국 문화예술인들을 규합한 단체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가 결성되고, 그 산하에 문학, 미술, 음악, 영화, 연극의 5개 분과 중 하나로 ‘조선미술건설본부’가 결성되었다. 조선미술건설본부는 고희동을 중심으로 동양화부, 서양화부, 조각부, 공예부, 아동미술부, 선전미술대 등 6개 분과로 활동을 펼쳤는데, 186명의 미술가들을 총괄한 해방 후 최대 미술가 조직이었다.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회 ‘해방기념과 연합군환영 미술전람회’(1945.10.20∼29)를 개최했으며, 해방 기념행사에서 국기 제작과 함께 표어·도안을 작성하기도 했다. 그리고 연합군 환영식에서는 미국·소련·영국·중국 등 4개국 국가원수들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11월 20일 ‘조선미술건설본부’가 해산되고 “정치에의 불간섭과 엄정 중립”을 강령으로 내건 ‘조선미술가협회’로 새롭게 결성되었다.

하지만 1946년 8월 11일 미군정청 문교부가 미술을 선택 과목으로 결정하자 ‘조선미술가동맹’과 ‘조선조형예술동맹’과 함께 ‘조선조각가협회’가 합류해 ‘조선미술동맹’을 발족하여 공동투쟁을 결의해 나갔다. 이들 단체는 ‘해방기념문화대전람회 미술전’(8월20∼27일)을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였지만, 이 역시 남북 이데올로기의 차별에서 비롯된 분열과 갈등이 지속되었다.

지역 1세대 화가 이인성(1912∼1950)과 이쾌대(1913∼1965) 역시 이러한 질곡의 시대적 변화를 직접 체험하며 참여해 한국 근·현대미술을 이끌어 나갔다. “과거가 햇볕을 쬐면 역사가 되고, 달빛에 젖으면 신화가 된다.”는 말처럼 격동의 시대를 파란만장하게 살다간 지역 예술가들은 조국 광복을 위해 무엇을 하였으며, 해방된 나라에 새로운 예술과 문화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경주했는가는 이제 새로운 시각에서 살펴야할 우리들의 과제이다.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화가들을 이제는 ‘신화의 존재’가 아닌 ‘역사적 인물’로 기록하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전문화된 연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