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나무와도 같아서 다시 무성해진다.
도시는 나무와도 같아서 다시 무성해진다.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 그러니까 현재의 서울은 일본인이 거주하는 남촌과 조선인이 거주하는 북촌으로 분리되었다. 그 역사는 18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같은 해 2월 주한 일본대리공사가 일본인의 안전을 위해 일본공사관과 영사관 주위에 집단거주를 요청하면서 거주가 시작되었다. 한일합방 이후 진고개 일대 충무로, 명동에 이르는 지역은 완전한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변모되었다. 특히, 1911년에 개설된 황금정(현 을지로)은 일본인 거주지를 청계천변까지 확장시키면서 본정통(현 충무로)과 함께 일본인 주거지의 중심가로로 성장한다.

특히 본정통은 가장 먼저 일본 민간자본에 의해 형성된 지역이라는 특성상 일본식 목조2층 건축에 의한 전형적인 일본식 가로 경관을 갖고 있었다.

난징조약으로 개항하게 된 상하이는 1843년 영국과 후면조약, 1844년 미국과 왕샤조약, 프랑스와 황푸조약을 맺었다. 이때부터 자국의 국민들이 거주할 수 있는 치외법권 지역이 만들어졌다. 영국이 제일 먼저 토지를 빌려 와이탄 도로를 중심으로 거리를 조성했고 미국과 프랑스가 뒤를 이어 조계지를 만들었다. 그 후 1861년 화이하이루 지역에 프랑스가 단독으로 조계를 차지하게 되었고 1863년 영국과 미국이 공동 조계가 되어 와이탄과 난징루 지역을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본과 조선은 하나의 나라라는 의미의 ‘내선일체’를 사상적으로 주입했다. 하지만 이 말의 허위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경성은 남촌과 북촌으로 분리되어 있었다. 상하이 역시 경성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상하이시는 조계지와 비조계지로 엄격히 분할되었다. 이러한 분리 속에서 경성과 상하이는 근대성을 대표하는 고층빌딩이 들어섰으며, 근대적 소비문화를 상징하는 호텔, 백화점, 커피하우스, 댄스홀, 극장과 영화관, 공원과 경마장 등이 생겨났다.

경성의 경우 1910년대까지만 해도 균형을 이루던 북촌과 남촌의 경제력은 1920년대에 이르면 현저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경성부내 주요 공공건물 중 북촌에 위치한 것은 식민지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하나에 불과했으며, 주요 건축물은 남촌에 위치하고 있었다. 상권성장과 변화를 주도한 것은 근대적 유통구조인 백화점의 급속한 확산이었다. 주요 간선도로에는 근대적 상업시설과 은행사옥과 지점들이 빠르게 지어졌고, 재래상권도 백화점을 필두로 하는 근대적 유통구조와 서비스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경성의 주요 간선도로변의 경관을 빠르게 변모시켰다. 카페와 함께 주목할 수 있는 것이 극장이다. 카페가 당시 지식인 교류장소의 역할을 수행했다면, 극장은 일반의 대중적 오락기능을 수행했다. 이 무렵 서울에 설립된 서대문의 연극전문극장인 동양극장(1935)은 장식이 제거된 차가운 무채색으로 포장된 전형적인 근대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신파극의 중심극장이었으며, 한국 사람을 위한 극장으로는 단성사·조선극장·우미관 등이 종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밖에 일본인의 영화관으로 황금좌, 약초좌, 명치좌, 희악관, 대정관 등이 있었다.

상하이의 조계지 조성 초기에는 와이탄의 스카이라인은 영국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영국영사관, 팰리스호텔과 같은 영국식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1920년대부터 파크호텔과 같이 높고 내부에 아르데코 형식이 더해진 현대식으로 설계된 미국식 건물들이 생겼다. 또 1892년 난징루에 최초의 백화점인 홀앤 홀츠가 개장을 하고 위크백화점, 레인 크로우포드 백화점 등이 잇달아 개장하였다. 1930년대 백화점은 유럽풍의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을 적용해서 고급스럽고 웅장함을 보여주고 소비자에게 이국에 온 것 같은 환상을 심어 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도시의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성은 1937년, 일본이 군벌체제를 갖추고 중국대륙에 대한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하면서 전시체제로 돌입하게 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시작되면서 경성의 철도와 철도역은 군수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전용된다.

또 대공 취약성을 강화하기 위해 곳곳에 방공시설이 확충되었으며, 전쟁 수행을 위해 일정한 구역 내에서 ‘건축물의 건축금지, 제한 또는 철거’ 등 물리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상하이 조계는 1845년부터 약 100년간 계속 되다가 1937년 중일전쟁과 제2차 상하이 사변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의 통제하에 놓였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군은 공동 조계에 진주하면서 영국인, 미국인을 억류했다. 1943년 난징의 왕조명 정권이 공식으로 공동조계, 프랑스 조계를 접수하면서 조계의 역사는 끝을 맺었다.

태평양전쟁과 함께 경성과 상하이는 일본의 영토가 되었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내부 속의 외부로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전쟁도 전쟁이었지만, 내전에도 상시 대비해야 했다. 전쟁 동안 경성과 상하이는 내부이면서도 동시에 외부로 존재하고 있었다.

상하이에 살았던 장아이링은 1943년 ‘봉쇄’라는 소설 속에 식민지 도시가 처한 상황을 재현했다. 이 소설은 상하이 공습 시기의 어느 전차 위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루고 있다. 공습으로 인해 봉쇄를 알리는 종소리가 땡땡 울리자 소심한 남자가 원래 자신이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한 여성에게 다가와 말을 건다. 그들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다. 그들은 점차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 가능성까지 얘기하게 된다. 몇 시간 후 공습이 해제되고, 전차는 다시 출발한다. 하지만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는 원래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녀는 이를 통해 깨닫게 된다. “봉쇄 순간의 모든 일들은 발생하지 않은 것과 같았던 것이다. 상하이 전체가 잠에 빠져 들고, 말도 안 되는 꿈을 꾼 것이다.”

이 소설은 어쩌면 전쟁 전 식민지 도시가 이룩한 근대적 발전이 꿈과 같은 것임을 알려주는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경성과 상하이는 지배자와 피지배자, 식민본국인과 피식민지인과 같이 대립을 실체화하는 공간으로 분할되어 있었다.

이러한 분할 또는 이항대립은 잘못된 관념이 만들어낸 허구에 지나지 않지만 엔블록으로 구체화되었고, 엔블록은 다시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주변을 분할하여 다시 중심과 주변을 만드는 일이나, 중심을 분할해 이것을 다시 중심과 주변을 만들려는 이유는 동일한 이유에서다.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공강일 서울대 강사·국문학

그것은 중심이나 주변이 충족할 수 없는 욕망의 덩어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한다. “중심은 현전적 존재자의 형태로 사유될 수 없다는 것, 중심은 자연적 장소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 중심은 고정된 장소라기보다 어떤 기능이며 기호의 대체가 무한히 일어나는 일종의 비장소라는 것”이다.

중심으로 인해 주변이 생겨나고 주변은 중심의 영향을 받게 된다. 중심은 주변을 동질화시키려는 제스처만 취할 뿐 결코 동질화를 용납하지 않는다. 이 중심에서 벗어날 때 억압도 배제도 사라진다. 중심과 주변의 끊임없는 분할은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런 비싼 대가를 치르고 세계는 ‘탈중심’의 가치를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심과 주변을 나누려는 욕망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세계의 한 편에 도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