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음주 사망자가 있었다

1 서울시 무형문화재 8호 ‘삼해소주가’의 김택상 대표, 오른쪽은 소주고리
1 서울시 무형문화재 8호 ‘삼해소주가’의 김택상 대표, 오른쪽은 소주고리

주량보다 술을 많이 마시는 일. 우리는 과음(過飮)에 대해서 관대하다. 요즘 현상이라고? 아니다. 뿌리가 깊다. 술은 두 종류다. 발효주(醱酵酒)와 증류주(蒸溜酒)다. 과일, 곡물을 발효시킨 것이 발효주다. 자연생태계에서도 생긴다. 알코올 도수는 19도 미만이다. 한국 막걸리, 일본 청주(사케), 유럽의 와인 등이 발효주다. 중국 고량주(高粱酒, 수수), 일본 고구마 소주(고구마), 프랑스 코냑(포도), 유럽의 각종 위스키(보리 등), 한국 안동소주(쌀)는 증류주다. 인위적으로 증류해야 얻을 수 있다. 도수가 높다. 대부분 40도 이상이다. 우리가 마시는 희석식(稀釋式) 소주는 주정(酒精)에 물을 더한 것이다. 주정은 에탄올(ethanol)이다. 증류주는 발효주보다 고급술, 비싼 술로 친다. 발효주를 만든 다음, 증류 과정을 한 번 더 거치기 때문이다. 곡물, 과일로 발효주를 만든 다음, 증류한다. 곡물 소비도 심하고 술의 양도 줄어든다. 예나 지금이나 증류주는 비싼 고급술이다.

술을 마시고 사람이 죽는다. 설마? 설마가 여러 사람 잡았다. 조선 시대 기록을 보면 퍽, 자주 ‘음주 사망사고’가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1417년) 윤 5월 4일의 기사다. 제목은 ‘박강생, 윤돈을 파직하다. 김문에게 소주를 많이 권하여 죽게 한 때문이다’이다.

수원 부사 박강생, 봉례랑(奉禮郞) 윤돈을 파직(罷職)하였다. 이 앞서 윤돈이 과천 현감에서 교대되어 서울로 돌아올 때, 박강생과 금천 현감 김문 등이 윤돈을 안양사(安養寺)에서 전별하였더니, 김문이 소주(燒酒)에 상(傷)하여 갑자기 죽었다. (중략) 헌부(憲府)에서 죄를 청하니, 임금이, “술을 권하는 것은 본시 사람을 죽이고자 함이 아니고, 인관(隣官)을 전별함도 또한 상사(常事)인 것이다.” 하고, 명하여 다른 일은 제외하고 파직하게 하였다.

윤돈이 과천 현감으로 일하다가 서울로 전근한다. 인근 수령인 수원 부사 박강생과 금천 현감 김문이 전별연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김문은 소주를 많이 마시고 상해서 죽는다. 이 죽음에 대해 사헌부에서 문제 삼는다. 태종의 대답이 재미있다. “설마 사람을 죽이려고 술을 많이 권했겠느냐? 벼슬아치들이 전별연을 여는 것도 늘 있는 일이다. 큰 잘못이 아니니 파직만 시키라”이다.

2 술이 괴고 있는 모습이다. 소주는 막걸리를 만든 후 증류 과정을 거쳐 만든다.
2 술이 괴고 있는 모습이다. 소주는 막걸리를 만든 후 증류 과정을 거쳐 만든다.

태종도 호주(豪酒) 꾼이었다. 조선 초기 왕실은 술에 대해서 상당히 관대했다. 술 때문에 희생된 이들도 많았지만, 음주를 엄하게 금하거나 처벌했다는 기록은 없다.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의 집안은 모두 호주 꾼이었다. 술맛을 아니, 과다 음주에도 관대했다고 추정할 뿐이다. 진안대군 이방우(1354~1393년)는 조선 건국 이듬해 죽었다. 일설에는, 고려의 신하였던 진안대군이 아버지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했고, 1392년 조선 건국 후 황해도 해주와 고향 함흥에서 술을 마시다가 죽었다고 전해진다. 죽었을 때 나이 마흔 살. 불과 5년 전인 1388년, 별 탈 없이 사신단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아버지는 조선을 건국했고, 자신은 왕자가 되었다. 죽을 이유가 없다. 조선 건국 반대, 시대에 대한 불만으로 통음(痛飮), 술병으로 사망? 실제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진안군이 술을 좋아했다. 날마다 마시더니 결국 소주를 마시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했다. 태종의 아들이자 진안대군에게는 조카인 양녕대군도 술에 대해서는 뒤처지지 않는다.

세종 4년(1422년) 11월14일, 대사헌이 양녕대군을 탄핵한다. 죄목이 엉뚱하다. ‘소주를 마시게 해 사람을 죽게 했다’는 것이다.

이제 재궁(梓宮)이 빈전(殯殿)에 계시온데, 일찍이 슬퍼하지 않고, 살림을 차리고자 하여(중략) 함부로 마을 사람을 불러서 돌을 실어다가 집을 꾸미었는데, 소주(燒酒)를 지나치게 먹여서 인명(人命)을 상하게 하니, (중략) “삼가 바라옵건대, 특히 유사(攸司)에 내리시어, 그 뜻에 있는 바를 국문(鞫問)하시면 매우 다행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이해 5월10일(음력) 태종이 세상을 떠났다. 11월이면 아직 탈상도 하지 않았을 때다. 맏아들인 양녕대군은 ‘부모를 돌아가시게 한 죄인’으로 거친 옷을 입고, 거친 밥을 먹으며 근신해야 한다. 그런데 함부로 마을 사람을 불러 집을 지었다. 큰 죄다. 하물며 일하는 이에게 소주를 많이 권해서 죽게 했다.

세종의 태도도 재미있다. 국문해야 한다고 탄핵하자 “윤허(허락)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듬해인 세종 5년, 이번에는 대사헌 혼자가 아니라 문무관 2품 이상의 고위직들이 연대하여 양녕대군을 탄핵한다. 이 탄핵에서도 “소주로 사람을 죽게 했다”고 명기했다. 여전히 세종은 움직이지 않는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인 세종 14년(1432년) 7월의 기록에는, 세종이 양녕대군에게 “좋은 안주와 소주[宣醞, 선온]를 내렸다”는 내용이 남아 있다.

세종 15년 3월의 기록에는 세종대왕의 술에 대한 ‘속마음’이 나온다. 이조판서 허조가 “소주로 목숨을 잃는 이도 흔하니 술을 과하게 마시지 못하게 법을 세우자”고 건의한다. 세종이 대답한다. “비록(소주 마시는 일을) 굳게 금하더라도 그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허조도 물러서지 않고 “그래도 법을 세우자”고 하니 세종이 마지못해 대답한다. “술을 경계하는 ‘주고(酒誥)’를 내리겠다”. 그뿐이었다.

관대한 분위기 때문인지, 벼슬아치들은 꾸준히 음주 사고를 일으킨다.

‘경차관(敬差官)’은 특정 임무를 띠고 지방으로 파견되는 임시직 관리다. 태종 4년 7월, 경차관 김단이 옥주(沃州, 옥천)에서 급작스럽게 죽는다. 사인은 ‘과다 음주’다. 한양을 출발, 경상도로 향하던 김단은 청주를 지나면서 소주를 과다하게 마셨다. 지방 관청에서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에게 음식을 대접한다. 공식적인 ‘지응(支應)’이다. 아마 지응 자리였을 것이다. 김단은 청주에서 과음, 멀지 않은 옥주에서 죽는다.

소주 때문에 패가망신을 당한 이는 고려 시대 김진(생몰년 미상)이다. 조선 후기 문인 낙하생 이학규(1770~1835년)의 ‘낙하생집_권20_동사일지’에 기록된 김진의 이야기다.
 

3 뒷줄에 보이는 작은 옹기가 소주를 보관하는 것이다.
3 뒷줄에 보이는 작은 옹기가 소주를 보관하는 것이다.

“소주(燒酒)는 노주(露酒)다. 원나라 때 처음 들어왔다. 고려 신우 원년,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소주를) 아낄 줄 모른다. 많이 마시면 재물을 잃는다. 앞으로는 소주를 비단, 금이나 옥같이 여겨 일절 금한다. 최영 전에 이르기를, 김진을 경상도원수로 삼았더니, 경상도 기생을 많이 모아, 무리와 밤낮으로 소주를 마셨다. 김진이 소주를 좋아하니 군중(軍中)에서 ‘소주도(燒酒徒)’라 불렀다. 마침내 왜구가 합포(마산)를 쳐서 불태우는데, 사람들이 소주도를 앞세워 왜구를 공격하라며 움직이지 않았다.(후략)”

노주는, 소주가 마치 이슬같이 맑아서 붙인 이름이다. ‘신우(辛禑)’는 우왕을 이른다. 조선의 선비들은 우왕이 고려 왕통이 아니라 승려 신돈의 아들이라고 여겼다.

우왕 원년에 이미 소주에 대한 경계문이 나온다. 몸을 상하기 전 재물을 먼저 잃는다고 했다. 소주를 금은보화같이 귀하게 여기고 앞으로는 금한다고 했다. 소주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김진이 경상도원수가 된 것은 불과 2년 후인 우왕 2년(1376년)이다.

‘음주 도원수’ 김진은 처참하게 패배하고, 그 벌로 서민으로 강등된다. 김진은 창녕, 가덕도에서 귀양살이했다. 조정에서 다시 부르려 했지만, 직속 상관인 최영이 끝까지 반대한다. 이글에는 “소주가 몽골의 원나라에서 한반도에 전래하였다”고 했다. 조선 중기 문신, 유학자 이수광(1563~1629년)도 ‘지봉유설’에서 “소주는 원나라 때 시작되었다”고 했다. ‘원나라 전래설’은 다수설이다.

소주는 아랍권에서 처음 발명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몽골의 원나라가 아랍의 ‘아라크’(Araq)를 배워서 고려에 전한 것이다. 소주는 한반도 개성, 안동, 제주도 등에서 처음 시작된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다. 원나라와의 교류가 잦았으니 소주 양조장도 많았다. 제주도는 말을 기르는 몽골 주둔지였다. 안동은 원나라의 일본 침략 시, 군수기지, 내륙집결지였다. 몽골은 개성-안동을 거쳐 마산 지역에서 일본 침략에 나섰다. 지금도 ‘안동소주’는 유명하다. ‘아라크’는 아랍어로 ‘땀’을 의미한다. 소줏고리로 소주를 내리면 마치 땀 같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지금도 안동 지방의 노인들은 소주를 ‘아래기’라고 부른다. 아랍어 ‘아라크’나 우리의 ‘아락주’와 비슷하다.

재미있는 것은 소주 기원, 전래에 대한 ‘이설’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청장관 이덕무(1741~1793년)는 ‘청장관전서’에서 “소주가 원나라 때 전해졌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송나라 사람 전석이 이미 ‘섬라주는 소주를 두 차례 내린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도 두 차례 내리는 환소주가 있으니 섬라(暹羅)주와 같다. 오키나와와 (일본) 사츠마[薩摩] 의 소주는 포성주(泡盛酒)라 한다”고 했다.

‘섬라’는 태국(SIAM)이다. ‘포성주’는 지금도 남아 있다. 소주는 기원전 3천 년에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원나라보다 훨씬 오래전이다. 청장관의 주장은 간단하다. 소주의 한반도 전래는 원나라 때인 12~13세기가 아니라 그 이전이라는 것이다. ‘원나라 전래설’이 다수설이지만 청장관의 주장도 무시할 바는 아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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