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균관 유생들의 ‘여름 특식’ 수박

조선 시대에도 이미 수박이 당뇨 등에 좋다고 믿었다.

늦여름이다. 수박 철이다. 이른 수박들이 흔하고, 한겨울에도 수박이 나온다. 수박이 제철을 잃었다. 수박 제철은 늦여름이다. 목은 이색(1328~1396년)이 남긴 시가 있다. 제목은 ‘수박을 먹다’이다. “마지막 여름이 곧 다해 가니/이제 수박[西瓜]을 먹을 때가 되었다/(중략)/하얀 속살은 마치 얼음 같고/푸른 껍질은 빛나는 옥 같다”(목은시고). 수박은 고려 말, 한반도에 전래 된 후, 조선 시대에는 전국적으로 흔하게 재배했다. 여름의 끝자락, 수박으로 마지막 더위를 보낸다.

다산 정약용의 귀양살이는 모두 세 번이다. 전남 강진의 귀양살이는 세 번째로 마지막이다. 첫 번째는 서산 해미, 두 번째는 장기였다. 장기는 지금 포항시 남구 장기면이다. 강진 귀양살이 중, 다산은 필생의 역작을 대부분 완성한다. 앞서 두 번의 귀양살이에서는 몇몇 시를 남겼다. 그 시에 수박이 등장한다. ‘다산시문집_제1권_시’의 ‘온천에서 느낌을 쓰다’다.

경진년 과거사를 또렷하게도/유민들이 이제껏 얘기를 하네/복성이 세자 행차 따라왔는데/한밤중 높고 맑은 노래 들렸네/쌀 주어 망가진 밭 보상하였고(賜米酬殘圃)/조세 감면 장마의 피해 위문해/내린 분부 사신이 따르지 않아/울분에 찬 백성들 마음 보겠네

온천은 온양이다. 시에는 ‘수박’이 등장하지 않는다. 설명이 필요하다. 다산의 첫 번째 유배는 ‘정치적 쇼’다. 1790년 2월, 다산 스물아홉 살.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9품의 소박한 자리지만 청요직(淸要職)이다. 반대파가 모함하고, ‘절대 불가’를 외친다. 정조는 ‘임명 강행’이다. 다산이 엉뚱하게 사직을 고집한다. 다툼은 임명권자 정조와 피 임명자 다산 사이로 번진다. 정조는 다산의 ‘사직 상소’를 ‘명령 불복종’으로 몰아붙인다. 서산 해미로 귀양. 1790년 3월 10일, 다산이 귀양지로 출발, 3월 13일 귀양지인 해미 도착, 3월 22일 해배. 겨우 열흘 정도의 유배. ‘정치쇼’라고 여기는 이유다.

위 시는 돌아오는 길에 온양에 들러 남긴 것이다. 경진년은 1760년(영조 36년)이다. ‘경진년 과거사’는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온양 온천에 들렀을 때 있었던 일이다. 다산은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온양에 들렀고, 이때, 30년 전 장헌세자가 온양에 왔던 일, 당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현지 노인에게 듣는다. 그중 하나가 ‘쌀 주어 망가진 밭 보상하였고(賜米酬殘圃)’라는 부분이다. 상세한 내용이 남아 있다.

장헌세자를 호위하던 금군(禁軍)의 말[馬]이 동네 주민들의 수박밭을 짓밟았다. 수박과 수박 넝쿨이 엉망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장헌세자가 밭 주인에게 ‘쌀’로 배상하고, 밭의 성한 수박들은 금군에게 내려 주었다는 내용이다. 백성들의 우레같은 함성이 뒤따랐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다산은 온양에서 사도세자의 발자취를 말끔히 정리정돈한다. 지금도 남아 있는 정조 어필 ‘영괴대(靈槐臺)’는 당시 다산이 주관, 세운 것이다. 장헌세자는 정조에게 아버지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런 장헌세자의 자취를 다산이 끄집어내어 결국 정조 어필의 비석까지 세우게 했다. 정치적이다. 짧은 귀양을 ‘정치 쇼’라고 보는 이유다.

포항 ‘장기의 수박’은 슬프다. ‘다산시문집_제4권_시’의 ‘장기농가(長鬐農歌) 10장’ 중 일부다. 장기에서 보낸 유배 기간은 220일이다. 그때 지은 시의 일부다.

(전략) 호박 심어 토실토실 떡잎이 나더니만/밤사이에 덩굴 뻗어 사립문에 얽혀 있다/평생토록 수박을 심지 않는 까닭은(平生不種西瓜子)/아전 놈들 트집 잡고 시비 걸까 무서워서라네(후략)

‘장기농가’는 ‘장기 농촌 노래’쯤 된다. 다산은, 당시 장기에 살던 농민, 어민들의 삶을 마치 그림처럼 상세히 그렸다.

‘온양 수박’은 1760년이다. ‘장기 수박’은 1801년이다. 40년을 두고 두 지역에 모두 수박 재배가 흔했음을 알 수 있다. 장기의 농민들이 수박을 기르지 않는 것은 슬프다. 세금 때문이다. 수박 역시 먹으려고 기르는 것이 아니다. 내다 팔려니 세금 문제가 걸린다. ‘장기 수박’은 명백하게 환금작물이다. 18세기 후반에 이미 수박은 널리 퍼져 있었다.

다산은 시에서 수박을 ‘서과(西瓜)’라고 표현했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수박을 이렇게 부른다. ‘서(西)’는 어느 지역의 서쪽일까? 중국의 서부 지역인 우루무치 일대다. 정확히는 중국인들의 ‘과일창고’라고 불리는 우루무치, 투루판 일대다. 포도의 당도가 세계 제일이고, 살구, 수박 등이 아주 좋다. 중국인들에게 우루무치 일대는 서역(西域)이다. 수박은 이 지역에서 전래 되었다. 수박을 서과, 서쪽에서 온 과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우리는 중국을 통해서 수박을 받아들였다. 그까짓 수박, 어디서 온들 무슨 이야깃거리랴, 싶지만 우리 선조들은 그렇진 않았다. 모든 과일, 채소 등이 어디서 왔는지 관심이 깊었다.

수박의 전래에 대해서 비교적 정확하게, 그러나 혼란스럽게 기록한 이는 교산 허균(1569~1618년)이다. 교산은 ‘성소부부고_26권_설부’에서 수박의 한반도 전래를 명확하게(?) 밝힌다.

수박[西瓜] : 고려 때 홍다구(洪茶丘)가 처음 개성(開城)에다 심었다. 연대를 따져보면 아마 홍호(洪皓)가 강남(江南)에서 들여온 것보다 먼저일 것이다. 충주에서 나는 것이 상품인데 모양이 동과(冬瓜 동아)처럼 생긴 것이 좋다. 원주(原州) 것이 그 다음이다.

제법 정확하게 보이지만 아리송하다.

홍다구가 홍호보다 빠르다고 했다. 틀렸다. 홍호(1088~1155년)는 중국 남송 시대 관리다. 홍다구(1244~1291년)는 고려 원종, 충렬왕 때 원나라의 고려 침략 앞잡이 노릇을 했던 이다. 홍호는 홍다구보다 1세기 이상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홍다구가 먼저 수박을 전래했을 리가 없다.

홍호의 이력을 보면, 그가 수박을 봤을 리도 없다. 수박은 열대성 과일이다. 홍호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고 15년 후 남송으로 돌아왔다. 금나라는 북방 유목민족의 국가다. 홍호가 강남에서 들여왔다? 믿기 어렵다.

수박은 12세기경 서역에서 비단길을 통해 중국에 전해졌다고 추정한다. 고려에 전해진 것은 13세기, 홍다구에 의해서라는 표현이 오히려 맞다. 모양이 동과처럼 생겼다고 했다. ‘동과’는 오늘날의 동아다. 겉껍질은 박처럼 생겼고 크고 길쭉하다. 수박 중 둥근 것이 있고 긴 것이 있다. 길쭉하게 생긴 것이 좋다고 했다.

수박의 모양에 대해서는 기록들이 일치한다. 교산 허균과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옥담 이응희(1579~1651년)는 수박을 두고, “서역에서 온 특이한 품종/언제 우리나라에 들어왔던가/녹색 껍질은 하늘빛에 가깝고/둥근 몸은 부처의 머리와 같다”라고 했다(옥담사집). 부처의 머리 모양은 동그랗지 않고 길쭉하다. 교산의 말과 일치한다.

한치윤(1765~1814년)의 ‘해동역사’에서는 ‘고려도경’을 인용, “고려에는 능금, 복숭아, 배, 대추 등과 더불어 ‘과(瓜)’가 있다”고 했다. 이 내용을 근거로, “고려 시대에도 수박이 있었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렇지는 않다. ‘고려도경’의 ‘과’가 서과 즉, 수박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고려도경’을 지은 송나라 사신 서긍(1091~1153년)이 고려에 온 것은 1123년이다. 홍다구보다 앞선다. 수박을 ‘서과[西瓜]’라고 부르지만, 오이[瓜, 과]와는 아주 다르다. ‘고려도경’의 ‘과’는 수박이 아니다. 시기적으로도 너무 이르다.

수박의 전래에 대해서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이유원(1814~1888년)의 말이 믿을 만하다. ‘임하필기_제32권_순일편_서과’의 내용이다.

어떤 사람이 서과는 원나라 세조 때부터 중국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초기에 절강의 순안 사람 방기는 이미 시를 짓기를, “줄줄이 이어진 꽃무늬는 침에 젖어 푸르고, 가닥가닥 붉은 속살은 멍이 들어 붉구나.[縷縷花衫粘唾碧 痕痕丹血搯膚紅]”라고 하였으니, 이때 절강에 이미 서과가 있었던 것이다. (중략) 송나라 말기 방회의 시에도, “서과는 갈증을 해소할 수 있으니, 옥같이 푸른 껍질을 자르네.[西瓜足解渴 割裂靑瑤膚]”라고 하였고,(중략) 호교의 “함로기”에, “내가 회흘(回紇)에서 서과 종자를 얻었는데 말[斗]같이 큰 열매가 달려 서과라 불렀다.” 하였으니, 그렇다면 서과는 호교를 통하여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중략) 우리나라는 경기의 석산(石山)과 호남의 무등산, 평안도의 능라도에서 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씨가 검은색이다.

회흘은 위구르 카칸국이다. 위구르, 우루무치, 투르크, 돌궐 등은 동의어거나 연관이 깊다. 즉, 중국의 수박(서과)은 오늘날의 우루무치 지역에서 시작되었다. 한반도 전래는 그보다 뒤인 고려 말기다. 홍다구의 개성 수박 시험 재배(?)가 믿을 만하다.

수박이 희귀한 과일은 아니었다. 다만 수박은 귀하게 사용되었다. 여름철 종묘에 천신하는 물품으로 앵두, 보리, 수박[西瓜], 참외 등이 등장한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도 여름철에는 특별히 수박을 지급했다. 조선 후기 문신 무명자 윤기(1741~1826년)는 ‘무명자집’에서 “성균관 유생들에게, 초복에는 개고기 한 접시, 중복에는 참외 두 개, 말복에는 수박 한 개를 준다”고 했다. 조선 시대 ‘국립대학의 학식(學食)’이다.

당뇨로 고생하는 이들도 수박을 귀하게 여기며 먹었다. 조선 초기 문신 사가정 서거정(1420~1488년)은 “10년 묵은 소갈병이 수박을 먹으면서 시원하게 낫는 듯하다. 약재보다 수박이 오히려 낫다”고 했다.(사가시집)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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