⑨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잠들어 있는 문무대왕릉.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우현 고유섭의 수필 제목이다. 모든 것은 이 한 문장에서 시작됐다. 지난밤의 불면도, 이른 아침부터 종일 나를 달뜨게 한 황홀감도, 대뜸 두 눈에 차오르던 파도도 다 저 한 문장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양양, 강릉, 삼척, 울진이 다 보암 직한 곳일 것이로되, 이 사람이 사모하는 곳은 세상 사람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무명(無名)인 듯한 장기(長<9B10>) 남쪽, 지금 행정구역으로 치자면 경주군 양북면 용당리에 속하는 땅에서 보이는 바다, 이곳이 잊히지 못하는 바다이다. (….) 이곳은 경주 석굴암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물이 다른 세류(細流)와 합쳐서 대종천(大鐘川)이 바로 바다로 들어가는 그 어귀에 용당산 대본리란 곳이 있고, 그 포구 밖에는 오직 한 그루의 암산(岩山)인 대왕암(大王岩)이란 돌섬이 있을 뿐이다.”(고유섭,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중에서)
 

죽어 용이 되어 왜구 막겠다는 문무왕
그 혼이 파도가 되어 감은사로 흐른다

선덕여왕 잠든 낭산서 지귀 떠올리니
여기저기 불꽃 뚝뚝 저녁이 타오른다

경주는 신과 왕들의 도시가 아니라
영원을 넘나드는 사랑의 도시 아닌가

고유섭은 인천 사람이다. 1905년에 태어나 경성제국대학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대학에서 조선미술사를 공부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경성제대 졸업 후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취임해 수많은 연구와 집필 활동으로 한국미술사학의 토대를 쌓아 올렸다. 한국미술의 근대적 학문 체계를 이룬 이 위대한 학자는 짧았지만 영원히 기억될 마흔 해의 불꽃같은 삶을 남겨두곤 1944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생전에 ‘잊히지 못하는 바다’로 호명한 곳이 바로 경주 용당리, 문무대왕릉이 있는 감포 바다다.

경주를 떠올리면 언제나 대왕암이 나를 짓누른다. 문무왕이 동해의 용으로 잠들어 있는 수중릉, 어깨가 뻐근하고 정수리가 날카롭게 아프다. 미지는 때로 고통이다. 내게 경주는 문무대왕릉과 감은사, 그리고 ‘잊히지 못하는 바다’인 ‘동해구’로 늘 기억된다. 동해구는 감포의 옛 이름으로 추정된다. 대종천 하구, 감포가 보이는 언덕에 동해구 표지석이 서 있다. 한자를 그대로 풀이하면 동해의 문, 동해의 입이라는 뜻이다.

지난밤, 바쁜 취재 일정으로 혓바늘이 돋을 만큼 피곤한 침대 위에서 문득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떠오른 바람에, 잠을 저만치 밀쳐둔 내 생각은 문무왕과 대왕암, 만파식적, 감은사와 송재학, 박목월, 서정주의 시, 진지왕과 도화녀, 비형랑, 미실, 선덕여왕과 지귀, 수로부인, 처용과 역신, 화랑세기 필사본 진위 논란 등을 이리저리 널뛰며 어지러웠다. 소설가 김별아가 연재한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 20꼭지를 내리 읽고는 1999년 KBS 역사스페셜 ‘추적, 화랑세기 필사본의 미스터리’를 인터넷 스트리밍으로 다 보니 새벽 다섯 시, 이상한 황홀감과 신비감을 이불로 덮고 잤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글비석.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글비석.

하루 묵는 데 100만원 한다는 포항 구룡포 럭셔리 풀빌라를 취재하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경주에, 아니 신라에 가 있었다. “이처럼 막막한 지역에서/ 하룻밤을 가면/ 그 안존하고 잔잔한/ 영혼의 나라에 이르는 것을”(박목월, ‘사향가’) 나는 이미 알았을까. 구룡포를 벗어나 16년 만에 문무왕릉 앞에 섰을 땐 눈물인지 파도인지 두 눈이 붉으락푸르락 물들어 있었다. 무당 몇이 굿판을 벌이고, 젊은 연인이 허공에 새우깡을 던지는 풍경 너머로 나는 입 벌린 대왕암을 봤다.

“경주에 가거든 문무왕(文武王)의 위적(偉蹟)을 찾으라. 구경거리로 경주를 쏘다니지 말고 문무왕의 정신을 기려 보아라. (….) 문무왕의 위대한 정신이야말로 경주의 유적(遺跡)에서 찾아야 할 것이니, 경주에 가거들랑 모름지기 이 문무왕의 유적을 찾으라. (….) 무엇보다도 경주에 가거든 동해의 대왕암(大王岩)을 찾으라.”(고유섭, ‘경주기행의 일절’ 중에서)

경주 용당리 사람들은 대왕암을 대왕바위의 줄임말인 ‘댕바’, ‘댕바위’로 불렀다. 1967년 한국일보 보도로 문무왕릉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이곳은 어린아이들이 헤엄쳐 가 놀고, 마을 사람들이 미역을 따는 갯바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옛날부터 문무대왕의 유해가 뿌려진 산골처(散骨處)로 알려져 있긴 했으나 어디까지나 신화의 한 대목일 뿐 고증된 바는 아니었다. 대왕암이 문무대왕릉이라는 전설을 역사적 진실로 밝혀낸 건 고유섭의 제자인 미술사학자 황수영 박사다. 황수영 박사를 축으로 한 신라오악조사단은 1967년 뗏목을 타고 대왕암에 상륙해 대왕암의 내부 모습이 고문헌에 기록된 ‘수중릉’의 구조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어 왜구를 막고, 고유섭은 사멸되어가는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해 미술사학을 연구, 학문으로 일제에 항거했다.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수필을 남겼는데, 황수영과 신라오악조사단은 스승이 쓴 글을 등불 삼아 풍문과 설화의 안개로만 자욱하던 미지 세계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대왕(大王)의 우국성령(憂國聖靈)은/ 소신(燒身) 후 용왕(龍王) 되사/ 저 바위 저 길목에/ 숨어 들어 계셨다가/ 해천(海天)을 덮고 나는/ 적귀(賊鬼)를 조복(調伏)하시”(고유섭, ‘대왕암’)던 감포에는 이제 고유섭과 그의 제자들 넋이 나란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용이 된 문무왕이 바다에서 솟구쳐 모습을 보였다던 이견대(利見臺)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 기념비는 고유섭의 제자들이 세운 것이다. 2003년, 내가 스무 살이던 해 여름 이견대에 왔을 땐 그 글비석만 홀로 바다를 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제자인 진홍섭(2010년 작고)과 황수영(2011년 작고) 추모비가 양 옆에 서 있다.

혼은 입으로 드나든다고, 언젠가 누군가에게 들었다. 저 수중여 입에서 빠져나온 왕의 혼이 파도가 되어 감은사를 적신다. 나는 문무대왕릉이 보이는 이견대를 내려와 대종천 물길 따라 옛 감은사터를 찾았다. 아직 뙤약볕이 되지 못한 온화한 햇살이 빈 절터를 구석구석 쓰다듬고 있었다. 절터 동쪽과 서쪽엔 감은사지삼층석탑이 멀리 대왕암을 바라보며 쌍탑으로 서 있고, 탑이 드리운 그늘 아래로 승려 하나가 천천히 걸어가며 내게 옛 감은사의 풍경을 복원시켰다. 그러나 “감은사는 없다.” “감은사 밖으로 나오면 먼 바다는 종소리 같은 저녁놀을 떠밀며 달아나 바람 소리 곁에 있다. 내 누추한 마음이 먼저 그것들을 짊어지기”(송재학, ‘감은사에 가다’) 전에 나는 서둘러 낭산으로 향했다.

감은사지를 걷는 스님.
감은사지를 걷는 스님.

선덕여왕은 “푸른 령(嶺) 위의 욕계(欲界) 제2천(第二天)”에 잠들어 있다. ‘푸른 령’이란 경주 낭산을 가리킨다. 선덕여왕은 어느 날 신하들에게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내가 죽거든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했다. 신하들이 ‘도리천’의 구체적 위치를 묻자 선덕여왕은 “낭산의 남쪽”이라고 대답했고, 사후 30년 뒤 그녀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불교 경전에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적혀 있으니 선덕여왕이 말한 대로 낭산의 남쪽이 도리천인 셈이다.

도리천은 불교에서 욕계 제2천에 해당하는 세계로 신(神)들에게도 남녀의 구별이 있고, 이성에 대한 욕망이 작동하는 곳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두 명의 남자와 세 번에 걸쳐 결혼생활을 했으나 아이는 없었다”고 한다. 죽음 후에도 사랑을 꿈꿨을까. 선덕여왕은 무척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또 자애로웠다고 전해진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지나가는 그녀를 보고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미쳐버린 사내도 있었으니, 그가 바로 천민 지귀(志鬼)다.

어느 날 여왕이 영묘사로 기도하러 가는 행차에 지귀가 달려들었다. “아름다운 여왕이여! 사랑하는 나의 여왕이여!” 여왕은 호위병들에게 붙잡힌 지귀를 영묘사까지 따라오게 한다. 지귀는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행차를 따랐다. 영묘사에 도착한 여왕이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는 동안 지귀는 그만 마당의 석탑 아래 잠이 들고 말았는데, 기도를 마친 여왕은 자신을 짝사랑하는 지귀가 안쓰러워 잠든 그에게 다가가 “살의 일로써 살의 일로써 미친 사내에게는 살 닿는 것 중 그중 빛나는 황금팔찌를 그의 가슴 위에”(서정주, ‘선덕여왕의 말씀’) 올려두었다. 잠에서 깬 지귀는 여왕의 금팔찌를 품에 안고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런데 그 기쁨이 가슴속에서 불꽃으로 타더니 급기야 온몸을 활활 사르는 불덩어리가 되었다. 여왕의 향기로운 팔찌가 불씨 되어, 지귀는 미친 사랑의 불길에 영원히 타는 불귀신이 되어버린 것이다.

경주 낭산의 선덕여왕릉.
경주 낭산의 선덕여왕릉.

여왕이 잠든 낭산을 내려오니 하늘에서 지귀가 사랑의 고통에 몸부림치느라 여기저기 불꽃이 뚝뚝, 저녁이 붉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뜨겁고 새빨간 석양은 이내 차분해져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 “영영 돌아오지 못한”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서정주, ‘해일’)던 여인처럼, 경주 하늘엔 바닷물 같은 구름과 볼그레한 노을이 살을 부드럽게 비볐다.

그리고 곧, 비가 내렸다. 예보에 없던 비였다. 우산 없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소동으로 황리단길은 개구리 떼처럼 수런거렸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황남동을 걸었다. 비에 흠뻑 젖으니 살갗보다 가슴부터 촉촉이 서늘해졌다. 머나먼 나라에 있는 나의 선덕여왕, 그녀의 불 달군 팔찌가 지져댄 내 가슴 속 뜨거운 한 통증이 비로소 식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아, 나는 그동안 잘못 알았다. 경주는 신라 천년의 도시, 신과 왕들의 도시가 아니라 영원을 넘나드는 사랑의 도시가 아닌가? 천년을 사랑하고 천년을 헤어져 그리워 할, 그 천년의 사람을 나는 만나고 싶다. 나의 잊히지 못하는 당신을.       /시인 이병철

    시인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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