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든 경북여성 (4)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성악가 추애경 下

신명여학교 재직시의 추애경.
신명여학교 재직시의 추애경.

1928년 워싱턴대 재학중 김태술과 결혼
보스톤 추기음악대회 참가
‘리릭소프라노 조선의 천재’ 언론 호평
1968년 자전적 소설 집필·1973년 운명

△미국에서의 활동

미국으로 유학간 추애경은 1927년부터 샤블 워싱턴대학교 음악과에서 성악전공으로 수학하고, 이어서 보스톤으로 학교를 옮겼다. 한편 1927년 여름 워싱턴대학교 음악과에 관계한 직후 추애경은 북미에서 실시된 성악콩쿠르에 출전했다. 이 음악대회는 그해 8월 8일~28일 와이노나(Wynonna) 호반(湖畔)에서 전미주(全美洲)에 있는 각국 학생 중에서 실력이 있는 33개국 200명의 음악가(성악·기악·작곡)가 모여 하기음악대회(夏期音樂大會)를 개최하고, 대회 마지막 이틀 동안 현상독창대회(懸賞獨唱大會)가 개최됐다.

이 하기음악대회에 시카고의 추애경을 비롯한 한국음악가는 모두 3명인데, 뉴욕의 김태술과 시카고의 현제명이 그들이다. 이 음악대회에서 현제명이 1등으로 뽑혔다.

추애경 송별음악회. 1927년 6월3일.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추애경 송별음악회. 1927년 6월3일.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이렇듯 이들은 미국유학 시절에도 함께 음악대회에 출전할 정도로, 서로 잘 아는 사이로 모두 대구 출신들이다. 한편 이듬해 보스톤 MIT공과대학 연구원에서 전기학 전공으로 미국유학 중이던 김태술은 1928년 1월 전미주대학정구선수권을 획득해 미국 보스톤지에 대서특필 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성악공부를 시작한 추애경은 1930년 보스턴 뉴잉글랜드 컨서바토리음악원(Boston New England Conservatory)에 성악전공으로 입학헸다.

추애경은 뉴잉글랜드음악원에 입학하기 2년 전, 워싱턴대학에 재학중이던 1928년 8월 25일에 인디아나주 완나텍에서 매시 목사의 주례로 김태술과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이후 추애경은 보스톤 뉴잉랜드음악원을 대표해 1932년 가을에 보스톤 추기음악대회에 참가해 언론에서 좋은 평을 받았다. 이 추기음악대회에서 추애경은 두 곡을 노래했다. 하이든 작곡의‘그를 다시는 사랑하지 않았소’와 킬 작곡의‘장미와 야앵’을 노래했다. 당시 보스톤의 음악잡지‘음악평론’에서는 추애경을 ‘리릭소프라노로 조선의 천재’라고 격찬한 바 있다. 이렇게, 뉴잉글랜드 컨서바토리음악학교를 다니면서 음악대회에 출전한 추애경은 1933년 6월에 졸업해 음악사(音樂士) 학위를 취득했다.

1926년 6월7일자 시대일보에 보도된 추애경 기사.
1926년 6월7일자 시대일보에 보도된 추애경 기사.

이렇듯, 미국에서 공부한 추애경은 뉴잉랜드음악원을 졸업한 이후 그곳 메샤추세츠주 보스톤시 월썸(Waltham)과 워터타운(Watertown)에서 음악을 가르치면서 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려나갔다. 이후 자녀가 생기자 추애경은 아이들 양육을 위해 가정주부로 들어오면서 자신의 성악활동을 접어야만 했다. 가정주부로 돌아온 추애경은 토요일마다 텍사스코(Texaco)사가 후원하는 메트로폴리탄오페라(Metropolitan Opera)를 청취하면서 음악에 대한 정감을 잊지 않았다. 한편 추애경은 1968년에 자전적 소설인‘THE FAMILY OF CHUNG SONG’ 1)을 집필했다. 이 책의 내용은 자신의 직접적인 가족이름만 같고, 다른 모든 내용은 소설화됐다.

추애경은 1973년 난소암으로 사망했고, 아들이 묻힌 매사추세츠주 브레인추리(Braintree)의 블루힐즈공원묘지(Blue Hills Cemetery)에 잠들어 있다.

한편, 추애경은 1969년 5월 31일 이화여자대학교 개교 83주년을 맞이해 당시 김옥길 총장의 주선으로 자랑스런 졸업생으로 선발돼 개교기념일에 공로상을 수여받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경북여성정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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