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자가 간다, 역사의 길로

현대·과거가 공존… ‘브랜드’가 된 황리단길

‘길’이나 ‘특정 지역’이 하나의 브랜드로 자리 잡는 경우가 드물게 있다. 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경우 슈테판 대성당 주위 ‘슈테판 플라츠’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1년 내내 붐빈다.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 주변 거리와 일본의 츠키지 수산시장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녔다.

서울 이태원의 경리단길과 부산 국제시장의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골목길, 대구 중구의 ‘김광석 다시 그리기 길’ 등은 한국에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길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복병’이 얼마 전부터 주목받고 있으니 바로 경주 황리단길. 앞서 언급한 ‘길’과 ‘지역’은 이미 높은 가치를 인정받는 하나의 ‘브랜드’로 성장했다.

황리단길
황리단길

황리단길은 곳곳에 숨어 있는 젊은 감각의 ‘맛집’과 멋진 한옥의 내부를 모던하게 개조한 ‘예쁜 카페’가 특화된 상품이다.

여기에 낡았지만 정겨움을 느끼게 해주는 간판을 단 세탁소, 문구점, 한의원 등이 함께 자리하고 있어 1970~80년대 풍의 클래식한 분위기까지 맛볼 수 있다. 이는 비단 20대 남녀만이 아닌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까지 황리단길을 아끼는 이유다.

기자가 이 거리를 찾았을 때는 평일 한낮. 그럼에도 전국 각처에서 경주를 찾아온 젊은 여행자들이 적지 않았다. 야외 테라스에서 차가운 커피 한 잔을 주문해놓고 사색을 즐기는 중년들도 눈에 띄었다.

황리단길에는 흥미롭게도 3~4개의 점집이 있다. 여기에 들러 재미로 사주나 관상, 애정운 등을 확인하는 것도 경주를 즐기는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보행자가 많고 차량도 함께 통행하는 거리이니만치 황리단길에선 예쁜 옷가게와 일식집 수조를 헤엄치는 커다란 농어에만 지나치게 눈길을 줘서는 곤란하다. 언제나 모든 것에 우선하는 게 안전이니까.
 

양동마을을 찾은 사람들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양동마을을 찾은 사람들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양동마을 언덕길을 오르는 즐거움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은 16세기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닦은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곳이다.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들이 모여 사는 세거지(世居地)로 500년을 이어왔다. 지난 2010년엔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입장료 4천원을 지불하면 1~2시간 동안 조선 중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보물과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무첨당, 향단, 관가정, 서백당, 심수정, 수운정의 날렵한 검은 기와와 동네 곳곳에 흐드러지게 핀 ‘선비화(花)’ 배롱나무 꽃을 보는 것은 마음 설레는 일.

기와집의 매력에 필적하는 건 잘 보존된 양동마을의 서민적인 초가(草家)들이다. 이 둘 사이를 오가노라면 더운 날씨도 잊고 야트막한 언덕을 힘 있게 오르내릴 수 있을 것이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섭씨 33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덮쳤지만, 한국 관광객은 물론 대만에서 경주를 찾은 30여 명의 단체관광객들도 얼굴에서 흐뭇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옛 추억을 끄집어내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는 건 분명 의미 있는 행위일 터. 양동마을엔 흐르는 땀을 식힐 커다란 나무 그늘도 부지기수다. 시간이 넉넉한 여행자라면 양동마을 체험관에 들러 전통 엿도 만들어보고, 쉬엄쉬엄 걸어 장태골까지 가보기를 권한다. 양동마을 문화관(문의 054-779-6127)도 빼놓으면 아쉽다. 시간을 맞추면 양동마을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해설사의 안내도 받을 수 있다. 경주시민과 경로우대자, 보호자와 함께 온 7세 미만 어린이와 국가유공자는 무료 입장이다.

자전거와 전동차를 타고 ‘경주 핵심 관광지’ 돌아보기

대릉원 입구와 첨성대 앞 도로변엔 삼륜 전동차, 소형 오토바이, 자전거를 빌려주는 가게가 많다. 5천~2만 원 정도를 지불하면 바람을 가르면서 교촌마을, 월정교, 국립경주박물관, 동궁과 월지를 효과적으로 돌아볼 수 있다.

좋은 목재로 만든 교촌마을 초가집에선 은은한 향기가 풍겨올 듯하다. 경주 최 부자 가문이 지향했던 ‘가진 자의 긍휼’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조성된 한옥마을이 바로 교촌. 중요민속문화재 제27호 경주 최씨 고택(古宅)과 경주교동법주 등이 볼거리. 이외에도 깔끔하게 정리된 마을 거리엔 아기자기한 찻집과 맛있는 간식을 판매하는 가게가 방문자의 발길을 붙잡는다.

거기서 5분만 달리면 월정교가 나온다. 옛 이야기 속 원효대사가 요석궁을 가기 위해 건넜다는 다리다. 이어지는 요석공주와의 ‘러브 스토리’는 이미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배웠을 터. 복원된 월정교는 웅장하고 세련됐다.

다시 자전거와 삼륜 전동차가 한여름 더위를 꺾어줄 바람을 일으키며 달린다. 귓가를 스치는 성하(盛夏)의 향기가 달콤했다.

이때 오른편에 나타나는 게 국립경주박물관. 역사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도 그냥 지나치기엔 뭔가 아쉽다. 박물관 내부엔 국보와 보물이 적지 않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박물관을 나와 조심스럽게 길을 건너 좌측으로 3분만 가면 동궁(東宮)과 월지(月池)에 이른다. 통일신라시대 왕자가 머물렀던 근사한 건물이다. 당시의 신라 귀족들은 월지를 바라보며 연회와 유흥을 즐겼다. 입장료 3천 원이 아깝지 않은 공간.

이제 빌린 삼륜 전동차와 자전거를 반납할 시간이 가깝다. 하지만, ‘신라 천년의 역사 속을 달렸다’는 인증샷을 남기지 않을 수는 없는 일. 동궁과 월지를 나와 대여점에 이르기 전에 소박한 연꽃을 만날 수 있다. 그곳에서 오래오래 간직할 추억이 될 사진 한 장 찰칵!
 

첨성대를 지나 대릉원으로의 도보 여행

사실 경주는 거리 전체가 ‘유적지’와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대하게 솟은 왕릉들을 보면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이 1천500여 년 전 조상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대릉원은 자그마치 3만8천 평의 땅에 23기의 능(陵)이 불규칙하게 들어서 신비롭고도 기이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대릉원을 산책한다는 건 ‘992년 신라의 역사를 돌아본다’는 의미와 동일하다. 현재는 진분홍 색채로 관광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백일홍이 만개했다. 재론의 여지가 없다. 아름답다.

심장을 흐르는 피가 뜨거운 청춘 남녀들은 더위도 잊고 손을 꼭 잡은 채 산재한 왕릉 사이를 걷는다. 가끔은 예쁜 한복을 차려 입은 여고생들도 눈에 띈다. 물론 이곳에도 외국인 여행자들이 적지 않다.

대릉원을 나와 길을 건너면 첨성대가 버티고 서있다. 대릉원과 첨성대는 지척에 있다. 신라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축조된 첨성대는 국보 제31호. 상상조차 하기 힘든 까마득한 시절에 하늘의 별과 달을 관찰하는 건축물을 만든 신라인들의 공학 기술이 놀랍다.

첨성대 주변 너른 벌판엔 갖가지 꽃들이 경주를 찾은 이들을 저마다의 몸짓으로 유혹한다. 당연지사 ‘인생 사진’을 찍기엔 최고의 장소. 따가운 햇살은 고맙게도 ‘잘 찍힌 사진’을 만드는데 도움을 준다. 예약을 하면 귀여운 동물 모양의 캐릭터를 형상화한 조그만 관람차를 타고 첨성대 인근을 찬찬히 살펴볼 수도 있다. 아이들도 아이들이지만 엄마와 아빠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소리 내 웃는 걸 자주 볼 수 있었다.

한국 고대 역사에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라면 대릉원 내에 있는 천마총을 찾아보는 게 필수 코스다. 금관과 벽화, 신라시대 토기 등을 꼼꼼하게 살피는 ‘학구파’들이 ‘연애파’ 못지않게 많았다.

감포 가는 길
감포 가는 길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경주의 길’

검은색 교복을 입고 양은 도시락통을 달그락거리며 학교에 다닌 중년들이라면 경주의 골목길이 향수를 자극할 것이 분명하다.

대릉원을 등지고 왼편으로 100m 정도만 가면 호젓한 골목이 손짓해 부른다. 정원 가득 오렌지빛 접시꽃이 반기는 오래된 집과 울퉁불퉁한 좁은 길이 잠시나마 ‘타임머신’을 탄 듯한 황홀감을 선물한다.

매력적인 풍경을 보며 자동차 운전을 즐기려면 보문호를 끼고 경주 외곽으로 달려보기를 권한다.

문무왕릉이 있는 감포에서 포항 구룡포를 잇는 해안도로 드라이브도 많은 이들이 추천하는 코스다. 구불구불 모퉁이를 돌면 기막힌 절경의 바닷가 마을이 손짓하고, 조금 더 가다보면 울울창창 시원스런 숲이 “어서 오라”고 인사를 건넨다.

신라 때부터 조선 후기까지 감포와 경주, 장기와 경주를 이어준 ‘왕의 길’은 이름부터가 흥미롭다.

문무왕의 장례 행렬이 지나간 곳이고,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만파식적(萬波息笛·나라의 우환을 없앨 수 있다는 전설 속 피리)을 찾으러 간 길이기도 하다. 등산을 즐기는 이들이라면 용연폭포까지 3.9km 구간을 이열치열, 땀 흘리며 올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는 독특해서 잊지 못할 경험이 될 터.

기자의 경우 국내 여행이건 국외 여행이건 빼놓지 않는 곳이 있다. 바로 재래시장이다. ‘가장 현실적인 현지 사람들의 냄새’가 가득한 공간이 바로 시장 아닐까.

경주의 성동시장(윗시장)과 중앙시장(아랫시장)은 위와 같은 기대에 거의 완벽하게 부응했다. 웃음 섞인 에누리 흥정과 눈과 코가 동시에 행복해지는 저렴한 먹을거리들이 지천이었다.

환한 웃음으로 손님들을 반기며 친절하게 길 안내까지 해준 두 시장 상인들이 “경상도 사람들은 딱딱한 말투에 불친절하다”는 세간의 편견을 깨끗이 지워줬다. 언제건 경주에 온다면 또 다시 찾고 싶은 시장들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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