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 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비는 물의 다른 이름이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자리를 바꾸며, 이동할 때마다 독특한 소리를 낸다는 것이 같은 족속임을 증명한다. 그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는 것도 물이나 비나 매 한가지이다.

여름에 들면서 장마가 시작되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빗소리가 발걸음을 횡계서원으로 이끌었다. 서원은 옛 모습을 지키고 섰으나 마당의 쑥부쟁이의 큰 키로 보아 사람이 지나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성큼 댓돌을 딛고 마루에 앉았다. 그사이 비는 더욱 거세어졌다. 거친 소리를 만들며 비는 물로 모습을 바꾸었다.

영천 횡계서원은 숙종 때 정규양이 지은 곳이다. 마당 한가운데 향나무가 외로이 비를 맞고 섰다. 300년은 족히 넘었을 나무다. 저 나무가 이곳의 역사다. 이제는 힘에 겨운 듯 목발에 팔을 의지하고 있다. 나무 앞에 학처럼 날렵한 정자가 앉아 있다. 집처럼 아늑한 학교이길 바랐던 정규양의 마음이 느껴진다.

숙종 때 지어진 것을 영조 때 문인들이 수리한 후 ‘모고헌’이라 고쳐 불렀다. 높은 벼슬길로 오르려하지 않고 물처럼 낮은 곳으로 흐르며 수많은 제자를 길러낸 뜻을 존경하여 ‘옛사람을 흠모하는 집’이라 고쳐 부른 듯하다.

계곡 아래로 내려갔다. 비탈에 서 있어서 물 가까이 선 누각의 다리가 더 길다. 까치발로 담장에 기대서 서당을 넘겨다보며 글 읽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물가에서 보면 이층 같고, 마당에서 보이는 건물은 단층이라 두 가지 모습을 한 모고헌이다. 앞면 두칸, 옆면 두 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팔작지붕이다. 지붕의 휘어진 곡선이 학이 날개를 펴서 막 날아오르려는 폼새다.

신발을 벗고 모고헌 마루에 올랐다. 툇간으로 둘러싸인 독특한 집이다. 계곡으로 향해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경치에 눈이 환해지는가 싶더니 물소리가 가까이 들려와 듣는 사람의 마음을 풀어놓게 한다. 그 소리를 만드는 것은 계곡의 모난 돌들과 빗물이다. 자기만의 공법으로 기막힌 음악회를 만든다. 그 소리를 모아서 마음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툇간이 있어서 모고헌의 가치가 높아지는 듯했다.

방의 주인은 가끔 문을 닫고, 제자들의 글 외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오수를 즐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 한 제자의 느닷없는 질문에 선생이 일어선다. 방 윗부분 벽장형식의 책장에 손을 뻗어 눈으로 훑는다. 어느 건물에서도 보지 못한 특별한 공간, 이곳이 학문을 논하던 곳이란 것을 보여주는 책장이다. 조그만 방에 한 사람의 제자라도 더 들여 놓기 위해 머리 위로 책장을 올렸던 것 같다. 나도 깨달음을 얻을까하고 손을 내밀어 책장을 쓸어본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시간에 여기 서있던 그들이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오랫동안 마루에 앉아 계곡의 음악회를 듣는다. 방밖은 사방이 툇간으로 둘러져 있어서 방안에서는 물소리가 잘 들리지 않겠지 했다. 자세히 보니 이런 내 짧은 소견에 일침을 가하듯, 삼면에는 문을 달아 놓아 계곡을 향해 열면 방에서도 물이 연결되는 구조이다. 그날 기분에 따라 계곡에 쓸리며 내려오는 물소리를, 글 읽는 소리 들으려 잠시 소에 머무르는 물소리를, 모고헌을 뒤로 하고 내달리는 물소리를 골라 들을 수 있다.

물소리는 휘모리장단으로 계곡을 쓸고 오다가 모고헌 앞에서는 잠시 걸음을 늦춰 진양조 장단으로 서성이며 맴을 돈다. 선비들의 글 읽는 소리에 취할까 싶을 때 자진모리 걸음으로 소를 빠져나간다. 명인이 연주하는 가야금산조가 계곡에 그득하다.

옛 장인이 들려주는 물소리에 내 마음을 꺼내 씻고 싶다. 몸이 힘겹다고 마음에게 신호를 보내도 나는 무시했다. 위로가 필요할 때 찾은 곳이 모고헌이다. 남편과 다툼이 있던 날에도,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도 나는 이 곳을 찾았다. 모고헌은 학문만 가르친 곳이 아니었다. 삶에서 휴식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공간이었다.

휴(休)는 나무 옆에 사람 인자를 붙여 만들었다. 사람이 나무 그늘에 들어가는 것이 쉬는 것이다. 모고헌은 향나무 그늘에 앉아 나도 그늘로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쉬는 것이 더 오래 걸을 수 있다고 가르쳐주었다. 모고헌을 좇아 내 삶에도 휴식을 주어야겠다. 오늘 같이 비가 내려 계곡 가득 물이 들어찰 때, 이곳으로 와 물소리를 길어 올려야겠다. 찾아오는 이의 발걸음에 화답하듯 모고헌의 물소리는 쉼 없이 여름을 실어 나르며 가슴 깊은 곳까지 푸르름을 새겨 넣는다.

시원한 음각의 물소리가 내 마음을 거풍시켜 준다. 저 계곡이 있어서 모고헌이다.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는 물소리가 있어, 학문이 있어 모고헌이다. 글 읽는 소리와 물소리가 맥놀이 되어 한 폭의 그림이 된다. 그림 속에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