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든 경북여성 (3)
남녀평등을 꿈꿨던 여성운동가 정칠성(下)

정칠성. 동아일보, 1928.01.06

정칠성은 기생 출신이라는 신분을 극복, 근우회 대표로 농민, 노동자 여성을 대변하고 여성 민중의 이익을 위해 활동했다.

그녀는 ‘낭만적 사랑을 꿈꾸는 여성’ , ‘남성에게 사랑받는 여성’으로 살기보다는 주체적인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기를 희망했다.

그녀가 두 차례의 일본유학을 감행한 이유 또한 교육을 통해 주체적인 자아로 살기 위해서 였다. 나아가 다른 여성들에게도 그 길이 열리기를 희망하며, 여성운동에 나선 것이다.

정칠성은 신여성은 가정이라는 ‘소(小)’보다는 사회라는 ‘대(大)’를 위해 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현대사회는 여성의 참여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정칠성을 사람들은 ‘사상기생’이라 불렀다. 이 무렵 ‘사상기생’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녀의 행보는 단연 두드러진다. 단순히 남성운동가를 돕기 위해 헌신적인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감상적 신여성’도 아니었으며, 여성으로서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안타까워하며 애끓는 마음을 글로 쏟아내던 낭만적 ‘문학기생’ 과도 달랐다.
 

기생 출신이라는 신분 극복하고
좌익 여성단체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위원 선임, 여성해방에 앞장
정치적 압제·남성 무관심도 비판

정칠성은 여성 노동자와 농민을 계몽해 이들의 해방이 곧 여성의 해방이라고 강조했다

해방 이후인 1945년 9월 정칠성은 좌익계 여성단체인 조선공산당 경북도당에 참여하고, 부녀부장이 됐다. 같은 해 10월에는 조선부녀총동맹 중앙위원에 선임됐다. 아무리 평등과 자유가 넘쳐나던 해방 직후라고 하더라도 기생 출신으로 여성지도자가 됐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동아일보. 1930년 1월 2일자.
동아일보. 1930년 1월 2일자.

이 무렵 남녀평등을 염원하는 정칠성의 목소리는 한층 고조됐다. ‘조선의 남편들이여, 여성계몽에 힘쓰는가?’라는 주제아래 정치적 압제와 더불어 남성들의 무관심에 대해 비판했다.

“그중에도 이중삼중으로 억눌리고 질식하는 여성들의 운명은 언제까지든지 기구만 하구려. 정치적 압력은 우리들의 직접적인 투쟁대상이니까 말할 것도 없지만, 더욱 절박한 고통을 주는 것은 조선의 남편들이에요. 소위 민주진 의일꾼들까지 가정내의 민주주의는 모르고 아내를 계몽하지않고 독서나 집회를 위해서 시간을 주지않고 이러고는 여성운동이 활발하지 못한것만 개탄하잖아요.”

<‘독립신보’ 1946년 11월 14일자>

노동과 여성이 함께 해방돼야만 진정한 독립이라는 정칠성의 사상은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그를 월북으로 인도하게 된다.

북한에 간 그는 1948년에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는 등 정치적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조선여성운동의 사적 고찰. (하단 오른쪽 두번째) 동아일보,1928년 1월6일자
조선여성운동의 사적 고찰. (하단 오른쪽 두번째) 동아일보,1928년 1월6일자

하지만 1958년 이후 남조선노동당 계열로 몰려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다.

그래서 61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처럼 북한 정권에 참여했다는 경력 때문에 그녀의 독립운동 경력이 잊혀졌다.

그녀가 간 길은 일제강점이라는 극악한 상황 속에서 누구나 갈 수 있는 쉬운 길은 아니었다.

열악한 환경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남성들을 대상으로 하는 경제전선에 뛰어들었던 그녀가 느꼈던 사회의 벽, 민족의 벽은 참담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러나 정칠성은 환경에 굴하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꿈꿨으며, 그 새로운 사회를 모든 여성들에게 주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차별과 억압에서 벗어나 모든 여성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열망하며, 거침없이 달려갔던 정칠성의 행보는 분명 새로운 미래를 여는 길이었다.

자유신문. 1946년 3월 9일자.
자유신문. 1946년 3월 9일자.

‘페미니즘(feminism)’ 또는 ‘여권주의(女權主義)’라고도 표현되는 여성운동은 인격의 확립과 생활의 독립을 목표로 해 종래의 속박과 압제로부터 여성의 자아해방과 생활영역 확장을 일궈내고자 하는 운동이다. 그러나 한국의 여성운동은 일제의 식민지라는 상황을 경험하면서 특수성과 독자성을 확보했다. 즉 여성운동이 봉건적 질서에서 벗어나 여성의 권리와 정치·경제·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려는 일반적인 세계여성운동의 흐름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민족운동의 일익을 담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들은 여성 스스로의 몫을 찾아야 할 뿐만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여권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 여성들은 개항기부터 국권회복운동에 나선 것이다. 그 가운데 사회주의 여성운동가들은 여성운동의 방향을 제시하고,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칠성은 그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