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주 한동대 교수
김학주 한동대 교수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금지가 단순히 아베의 반한 감정이라면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에 일본의 전략적인 계산이 숨어 있다면 한국경제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일각에서는 아베가 반한감정을 자극하여 참의원 선거에 이용하려는 술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베는 일본 내에서 아베노믹스를 통해 일본기업들의 지속적 성장을 위한 혁신의 발판, 즉 르네상스의 기틀을 만들었다는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굳이 반한 감정을 자극하여 극우세력을 결집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다. 특히 이런 식의 보복은 일본 반도체 부품업체들에게도 타격을 준다. ‘경제 동물’이라고까지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계산적인, 그리고 용의주도한 일본이 이런 대응을 한다는 것이 매우 낯선 상황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무역 제재 뒤에 뭔가 숨은 것이 있지 않을까?

일본의 최대 고민은 미국의 자동차 수입 관세다. 일본경제가 현재 자동차 산업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미국 정부로부터 일본 차에 수입관세가 부과되면 일본경제는 치명타를 맞을 수 있다. 일본 내 자동차 생산에 직접 종사하는 종업원 규모가 83만명 정도로 알려지지만 자동차 수리, 보수, 마케팅, 금융까지 포함하면 500만명이 넘는다.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엔저에 따른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를 시정하기 위한 강제 엔고 조치다. 그런데 당시 미국의 무역적자를 특히 키웠던 것이 자동차였으므로 그 후 일본의 자동차 업계는 충격을 받았다. 그럼에도 일본이 흔들리지 않았던 이유는 훨씬 더 큰 전자산업이 있었기 때문인데 지금은 IT의 주도권을 한국에 뺏긴 상황에서 자동차 관세는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은 자동차 산업을 지키기 위해 미국에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것을 한국의 반도체 업체들이 내도록 하려는 것일까? 반도체 소재나 장비의 경우 세계적으로 독과점적인 것이 여럿 있고, 그 가운데 일본이 주도하는 분야도 있다. 예를 들어 이번에 제재 품목에 포함됐던 감광액(photo resist)이 공급되지 않으면 차세대 노광장비(EUV)를 쓰기 어려워 삼성전자가 야심 차게 준비하던 비메모리 분야에 차질이 불가피하다. 또 차세대 디스플레이인 OLED 소재 가운데 일본업체가 독점하는 것들도 있다.

만일 일본이 삼성전자를 힘들게 하면 당장 미국의 마이크론 테크놀러지가 메모리 부문에서 반사이익을 받고, 또 인텔과 같은 미국의 비메모리 업체들이 삼성전자 같은 미래의 경쟁자를 제거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과거 마이크론은 일본의 엘피다를 인수했었다. 그러나 마이크론 내 일본 지분은 없다. 즉 일본이 전략적으로 삼성전자 대신 마이크론을 밀어준다면 미국 제재를 피하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이런 생각이 “트럼프와 합의된 것인지, 아니면 아베가 알아서 기어보는 것인지” 불확실하다. 일본의 무역제재가 왜 하필이면 G20회담 직후에 나왔을까? 물론 단순한 아베의 반한 감정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일본 소재 업체들의 희생도 따른다. 반도체 부품의 소비자들이 삼성전자처럼 독과점 지위에 있으므로 납품선을 돌리기가 어렵다. 중국 업체들이 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일본의 소재 및 장비 구입을 원하지만 트럼프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마이크론이 설비를 충분히 확장할 때까지 일본 기업들도 기다리며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 기업들은 정부 말을 잘 듣는다. 일본 정부가 “일본 자동차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하자”고 설득하면 일본 반도체 소재 기업들이 따를 가능성이 높다.

세계경제가 저성장으로 돌입하며 먹이가 줄어드는 가운데 힘이 약한 나라로 피해가 넘어오는 것 아니냐는 걱정이 든다. 성장기에는 모두가 너그럽지만 이제는 누가 하나 사라져 주면 나머지가 행복해지는 시대가 되어가는 것 같아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