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든은 인류에게
‘심포니’와 ‘현악4중주’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에스테르하지의 하인이 아니라
진정한 ‘음악의 하인’이었으며
거장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준
고전파 시대의 진정한 거인이었다

하이든의 초상.  /en.wikipedia.org
하이든의 초상. /en.wikipedia.org

자동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이어와 브레이크라고 한다. 타이어는 어딘가로 잘 달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고 브레이크는 그것이 지나치지 않도록 느려지거나 멈추게 하는 것이니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서로 대조되는 기능을 가졌다고 볼 수 있겠다.

필자는 ‘보수’와 ‘진보’의 개념도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본다. 진보는 사회가 변화하여 발전할 수 있도록 추진력을 부여한다면 보수는 변화가 지나치지 않도록 과거로부터의 소중한 것을 지키고 중요한 것이 제외되지 않도록 충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진보와 보수의 절충이 이루어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그 날이 올 수 있을지 요원하기만 하다.

필자는 음악의 역사에서 보수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 음악가를 소개하고자 한다. 바로 요제프 하이든(F.J.Haydn·1732∼1809)이다. 하이든은 모차르트, 베토벤과 같이 고전파 작곡가이자, 비엔나 3인조로 불리지만 생애는 그들과는 매우 달랐다. 하이든의 아버지는 목수이며 어머니는 요리사인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러나 29세가 되던 1790년부터 약 30년간 헝가리의 명문 귀족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궁정악장으로 일하게 되며 자신의 천부적인 창의력과 근면함을 바탕으로 바로크가 물려준 기악형식의 가능성을 실험하게 된다.

하이든은 100곡이 넘는 교향곡을 써서 ‘교향곡의 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다. 교향곡은 명실상부하게 클래식 음악이 이룩해낸 최고의 성과이자 인류에게 주어진 축복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하루아침에 누군가가 발명해 낸 것이 아니었다. ‘심포니(Symphony)’의 어원이 ‘동시에 울리는 음’ 또는 ‘완전 협화음’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으며 이탈리아어 ‘신포니아(Sinfornia)’는 초기 오페라의 서곡에서 연주되는 짧은 기악 합주곡을 일컫는 말이었다. 하이든의 교향곡작품을 모두 살펴보면, 누군가의 일생을 어린 시절 부터 어른이 될 때까지 앨범을 보고 그 변화를 알 수 있는 것처럼 교향곡의 발전 과정이 요약되어 있다.

하이든의 고용인 니콜라 에스테르하지의 초상.  /esterhazywein.at
하이든의 고용인 니콜라 에스테르하지의 초상. /esterhazywein.at

하이든의 교향곡 작품은 순전히 그의 창작의지로만 작곡된 것은 아니었다. 그의 신분은 에스테르하지 가문의 ‘하인’ 이었다. 그가 궁정악장으로 봉직하던 시절 하이든이 등장하는 회화 작품들을 보면 하인의 복장을 하고 있으며 이것은 주인의 요구대로 곡을 써야 했음을 의미한다. 에스테르하지 공작이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하이든의 음악과 자유의지를 존중해 줬다고는 전해지나 고용인의 음악경향을 따라야 했을 것이다.

하이든이 궁정악단에 고용된 뒤 에스테르하지 공작에게 하루를 음악으로 표현해 달라는 명령을 받고 교향곡 6번(아침), 7번(점심), 8번(저녁)을 작곡하게 된다. 귀족이라는 계급이 태생적으로 안정적이며, 급진적인 변화를 거부하기에 음악성향을 베토벤처럼 작품 하나를 기점으로 명확히 진보적, 급진적으로 작곡하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에스테르하지의 궁정악단을 사임하고 난 뒤인 1791년에 영국으로 건너가 흥행을 위한 교향곡을 쓰게 되는데 93번에서 104번까지의 총 12개의 교향곡이며 하이든을 영국으로 초청한 잘로몬의 이름을 따 ‘잘로몬 세트’ 라고도 불린다. 이 12개의 교향곡은 ‘94번 놀람’, ‘100번 군대’, ‘101번 시계’, ‘103번 큰북연타’ 등 대부분이 자신이 붙인 표제가 아니라 후세사람들이 붙이긴 하였지만, 하이든 특유의 유머와 재치가 듬뿍 들어간 개성 있는 명곡들이 즐비하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하이든의 잘로몬세트 교향곡이 나온 시점이 모차르트가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라는 것이다.

우리는 고전파 음악가라고 하면 습관적으로 하이든-모차르트-베토벤이라는 출생 순서를 떠올리며 음악양식도 순서대로 변화하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이든의 후기 교향곡이 모차르트의 후기 교향곡보다 늦게 발표된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은 드물다. 주목할 것은 모차르트의 작품이 하이든보다 파격적으로 달라진 부분이 많이 있지만, 그런 작품이 발표되고 난 후에도 하이든은 자신의 교향곡 스타일을 고수하였다는 점이다.

현악4중주를 묘사한 그림.  /mblog.daum
현악4중주를 묘사한 그림. /mblog.daum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24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서로 존경하였으며 상대의 음악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모차르트와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현악 4중주의 창시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하이든을 위해 1785년 현악4중주를 위한 연주회를 열어 6곡의 작품을 하이든에게 헌정하였다. 이 연주회는 역사에 남을 만한 연주회였는데(당시에 사진이 없는 것이 아쉬울 만큼)연주자를 살펴보자면 제 1바이올린에 하이든, 제 2바이올린에 디터스도로프(K.D.V.Dittersdorf·1739∼1799), 비올라에 모차르트, 첼로에 반할(J.B.Wanhal 1739-1813) 등으로 구성되어 음악사에 기념비적인 현악4중주 연주회였다. 모차르트는 헌정사를 남겨 하이든에 대한 존경을 표현했는데 소개하자면 “당신이 저의 작품을 친절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결함이 있다면 너그럽게 보아달라고 간청합니다.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제 눈은 그런 결함을 못 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연주가 끝난 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말하길 “신 앞에서 그리고 정직한 인간으로서 말하는데 당신의 아들 모차르트는 지금까지 내가 겪어봤거나 이름으로 아는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작곡가입니다.”라고 모차르트 음악에 대한 존경을 표하였다. 그리고 어디에서든 모차르트를 폄하하는 말을 들으면 그를 지지하는 말을 했었다고 한다.

하이든의 음악사적인 공헌은 앞서 소개한 교향곡 형식의 확립 이외에 현악 4중주를 기악장르로 정립한 것인데 “심포니로 시작해서 현악 4중주로 마무리한다”라는 말이 있듯이 대문호 괴테(J.W.V.Goethe·1749∼1832)는 현악 4중주를 “4명의 현자들이 나누는 훌륭한 대화”라고 표현했고, 저명한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Einstein·1880∼1952)은 하이든의 현악 4중주를 “하이든 생애의 뛰어난 업적일 뿐만 아니라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으뜸가는 업적”이라고 하였다. 현악 4중주는 단순히 악기 4대가 이루어 내는 합주일 뿐 아니라 악기 제각각 개성 있는 소리와 완성된 테크닉으로 자신의 음악을 표현해야만 효과적인 울림을 낼 수 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은 구성원이 자신의 소리를 자제하고 하나된 울림을 위해서 최소한의 ‘자기희생’이 필요한 것과는 다른 성격이다.

하이든은 70곡이 넘는 현악 4중주를 작곡하였으나 그 중 53번 ‘종달새’의 1악장과 지금 독일의 국가로 사용되고 있는 ‘오스트리아 찬가’ 77번 ‘황제’의 2악장을 추천하고 싶다.

하이든 오라토리오 ‘사계’의 자필 악보.  /blog.naver.com
하이든 오라토리오 ‘사계’의 자필 악보. /blog.naver.com

하이든의 별명은 아버지라는 뜻의 ‘파파’라고 불렸다. 이것은 그의 성격이 넉넉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관대하고 아버지처럼 편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파파’라는 그의 애칭처럼 그는 자신보다 진보적인 작곡가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으며 1793년에는 베토벤의 음악을 듣고 그의 스승을 자처하는 등 지지자의 역할을 하였다. 필자는 이것을 천성적으로 타고난 하이든의 성격도 있지만 그의 살아온 과정 속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이든은 신분적,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에 태어났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 ‘포르포라(N.G.Porpora·1686∼1768)’에게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웠는데 그에게 레슨비를 지불할 사정이 되지 않아 각종 심부름을 하는 등 몸종의 일을 자처하여 비용을 대신했으며 에스테르하지 공작에게 고용이 될 때까지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하였다. 이런 힘든 배경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친분을 쌓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적대적인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해 주의하였을 것이다. 하이든이 유언장을 작성할 때 옛 연인과 자신에게 도움을 주었던 많은 지인들에게 골고루 유산을 배분한 장면을 봐도 그가 사람을 소중히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하이든의 성격은 그의 음악에서도 여지없이 나타나며, 그에게 도움을 준 모든 사람들과 평생 동안 음악을 할 수 있는 운명을 부여한 신에게 진정으로 감사하였던 것 같다.

그가 작곡한 마지막 교향곡인 104번 ‘런던’은 그를 초청하고 음악에 환호해 준 영국에 대한 감사와 존경이 담겨 있으며 69세가 되던 1801년에 발표한 오라토리오 ‘사계’에서는 계절의 아름다움을 찬미하기 보다는 수확물을 내리신 신에 대한 농민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하이든이 인생에서 행한 유일한 실수는 ‘결혼’이었다. 모차르트의 음악 어법을 따라가진 않았지만 결혼한 과정은 모차르트가 사랑했던 여인의 동생이었던 콘스탄체와 결혼했던 것과 비슷했는데, 하이든도 그가 매우 사랑했었던 여인 ‘테레제’와 결혼하지 못하고 그의 언니였던 ‘마리아 안나 켈러’와 결혼하였다. 하이든의 자필 악보를 냄비 받침대나 머리를 마는데 사용할 만큼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자신의 동생을 하이든이 사랑하였던 사실을 평생 동안 분하게 여겼다고 하니 하이든과는 어울리는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하이든은 ‘파파’라는 별명과는 어울리지 않게 자식이 없었다. 하지만 하이든은 인류에게 ‘심포니’와 ‘현악4중주’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 에스테르하지의 하인이 아니라 진정한 ‘음악의 하인’이었으며 거장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범을 보여 준 고전파 시대의 진정한 거인이었다. /문양일 포항예술고 음악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