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만든 조각품, 돌로미티에 빠지다
2019 경북산악연맹 트레킹記 ②

초원을 지나 바위산을 오르기 직전 전형적인 트레커 모습인 추선희 여사.

세체다산장을 떠나 천상(天上)의 화원(花園)이 만들어 낸 꽃길을 따라 기분 좋은 워킹에 넋이 나간다. 시원한 바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감미롭고 매끄럽게 얼굴을 부비며 속삭인다. 바람과 햇볕의 화음이 이어지면서 한참을 날 듯 내려오니 ‘피에라롱기아(Pieralongia·2천291m)’ 산장이다.

많은 트레커들이 삼삼오오 앉아 시원한 맥주랑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한 쪽에서는 상의를 벗은 채 해바라기를 하며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는 사람도 보인다. 이런 멋진 곳에서 시원한 맥주 한잔이 없으면 섭섭하다. 총무를 맡은 김종익 후배가 한잔씩 돌린다. 2천m가 넘는 고지 기암절벽 바위산 아래 녹색 초원을 바라보며 들이키는 맥주 맛은 세상 어디에서도 맛 볼수 없는 황홀한 맛이다. 너른 초원에는 야생화 천지요, 뒤로는 ‘세체다’ 높은 바위 봉우리가 감싸는 천상에서 유유자적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해 갈 길을 잊은 듯 일어날 줄을 모른다. 뒤돌아보면 아쉬움이 남을 것같아 앞만 보고 다시 꽃 들판과 언덕배기를 오르고 내린다.

이번 트레킹에 참가한 세 사람의 여성 참가자인 필자의 내자(內子)와 강석호 국회의원(경북산악연맹 명예회장)부인 추선희 여사, 박의룡 연맹 부회장 부인인 강성희 여사 모두가 야생화에 꽂혀 나아갈 줄을 모른다. ‘꽃과 나비’가 아니라 ‘꽃과 여심(女心)’을 보는 듯 험준한 산악지역에 온 트레커가 아닌 꽃동산에 놀러 나온 소녀 같다. 트레킹 중 유일하게 동양인, 그것도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강원도 고성에 산다는 분들인데 벌써 한 달째 유럽지역을 여행 중이라니 너무나 행복해 보인다.

3, 회갑 생일을 맞은 박의룡 부회장을 위한 축하 퍼레이드를 펼치는 일행들.
3, 회갑 생일을 맞은 박의룡 부회장을 위한 축하 퍼레이드를 펼치는 일행들.

‘세체다’봉을 뒤로하고 맞은편 ‘오들(Odle)’산군의 최고봉 ‘사스 리가이스(Sas Rigais·3천25m)’의 위용을 바라보며 비교적 평탄한 트레일(산속 작은 길)을 따라 3시간여 만에 ‘콜 라이저(Colraiser·2천106m)’산장에 도착했다. 꽤 넓고 큰 산장에는 많은 트레커와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앉아 요리와 음료를 들며 웃고 떠들며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보기에는 먹음직스럽고 여러 가지 음식이 나오는데 너무 짜서 선뜻 손이 가질 않는다. 좋다는 이탈리아 음식을 얼마 먹지 못하고 아껴둔 우리 전통술(?) 소주와 맥주를 섞어 시원하게 한잔하니 눈이 좀 뜨이는 것 같다.

눈부신 오들 산군의 파노라마를 감상하며 시간을 보내다 산장 기념 스템프를 찍고 내려온다. 그런데 내자가 들고 다니던 스틱을 산장에 두고 내려와 필자가 허겁지겁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산장 한쪽에 있던 스틱을 찾아 내려오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돌로미티 트레킹의 첫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 저녁에는 추 여사께서 근사한 와인과 맥주를 협찬하여 맛있는 저녁만찬이 되었다. 이번 트레킹에는 앞서 밝힌 세 분의 여성참가자 외에 박의룡 도연맹부회장과 이동찬 안동시연맹 회장, 김성광 자문위원(청송), 삼일산악회 소속 세 분(배태하 전무, 박덕순 부장, 정찬호 과장), 임종석 강석호 의원보좌관 그리고 포항뿌리회 후배 김종익, 황찬규 등 13명이 함께 했다.

이곳 티롤호텔의 사우나 시설이 잘 되어 있다는데 남녀 공용사우나라고 하여 선뜻 나서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재치 있는 몇 분은 사우나에 들렀다온 자랑(?)을 해 웃었다. 이 날 밤 필자에게 오랜 친구가 찾아 왔다.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며 즐거운 인생을 살아가는 친구 정명기 사장이 돌로미티 트레킹을 마치고 마침 ‘산타 크리스티나’에 머물고 있었다. 그간의 여러 트레킹 정보도 알려주고 건강하게 트레킹을 즐기라고 당부하고 헤어졌다. 먼 이국땅에서 죽마고우를 만난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닐 것 같다.

이튿날, 6월28일 2일차 일정이 시작된다.

동계스포츠 성지(聖地)라고 알려진 ‘카나제이(Canazei·1천460m)’로 숙소를 옮기기 때문에 짐을 꾸려 내려놓아야 한다. 이번 트래킹의 진행과 인솔은 우리 연맹과 업무협약이 되어 있는 혜초여행사의 이진영 상무가 직접 모든 걸 가이드하게 되었다. 오래전부터 잘 아는 후배라 믿음직스럽고 돌로미티 트레킹을 여러 차례 진행한 베테랑이라 더욱 안심이 되는 친구로 워낙 산을 잘 타 ‘날 다람쥐’라는 애칭이 붙어있는 당찬 산꾼이다.

어린 자녀들을 2천미터가 넘는 고지대까지 데리고 온 이탈리안 부부.
어린 자녀들을 2천미터가 넘는 고지대까지 데리고 온 이탈리안 부부.

오늘은 ‘알페 디 시우시(Alpe Di Sius) 코스’를 트래킹 한다. 이제부터는 전용차량으로 9인승 택시를 이용한다. ‘알페 디 시우시’까지 케이블카로 10여분을 올라 ‘콤파치(Compatsch·1천850m)’산장을 거쳐 아래쪽 리프트를 타고 ‘파노라마(Panorama·2천9m)’산장에 내려 광활한 초원을 걷는다. 야생화로 뒤덮인 초원길이 끝도 없이 펼쳐지고 까마득히 먼 곳에 솟아오른 바위봉우리가 병풍처럼 초원을 두르고 있다. 2천m 넘는 고지에 축구장 8천개 넓이로 이루어진 ‘알페 디 시우시’ 대초원이 돌로미티 알프스 최대 목초지이자 휴양지로 여름에는 등산객, 자전거, 오토바이 라이더들의 천국이며 겨울에는 수많은 스키어들이 북적이는 곳이기도 하단다.

끝도 없는 들판의 초원길을 걸으며 알프스의 진면목을 느껴보기도 한다. 트레일 곳곳에 쉴 수 있는 나무의자가 있고 등받이에 이곳 산악인들의 이름을 새겨 놓았다. 수많은 고산과 암벽들이 즐비한 돌로미티가 오래 전부터 유명 산악인을 배출하는 요람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산악인 ‘라인홀트 메스너(Reinhold Messner·1944년생)’가 이 곳 돌로미티에서 태어나 15세 때 이미 3천m급 암봉을 올랐다는 전설을 만들었고 세계 최초 ‘히말라야 8천m급 14좌 완등’이라는 신화를 창조하여 이탈리아 돌로미티를 세계에서 각광받게 한 ‘아탈리아의 영웅’이 되었다.

초원의 끝은 오름이다. 아직도 녹지 않는 눈 계곡을 건너기도 하고 가파른 오름길은 가쁜 숨을 토해내게 한다. 2시간여를 올라 암릉 안부에 다다르니 돌로미티 최고봉 ‘마르몰라다(Marmorada·3천343m)’가 저 건너 하얀 눈을 뒤집어 선채 물끄러미 우리를 바라본다. 기암절벽이 온통 제멋을 뽐내고 있고 그 속으로 울긋불긋 트래커들이 쉼 없이 헤집고 들어간다. 웃통을 벗기도 한 간편한 복장에 힘들어 하지도 안은 채 성큼성큼 오르는 유럽인들이 마냥 부럽기만 하다. 남녀노소 없이 잘도 오른다.

파란 하늘과 하얀눈, 우뚝 솟은 오들(Odle) 산군의 암봉과 초원의 야생화가 어루어진 돌로미티 트레킹 루트.
파란 하늘과 하얀눈, 우뚝 솟은 오들(Odle) 산군의 암봉과 초원의 야생화가 어루어진 돌로미티 트레킹 루트.

안부에서 휴식을 취한 뒤 바위봉우리 허리로 난 트레일을 따라 1시간여를 올라 고개를 넘는다. 오른쪽 ‘테라로사(Terrarossa·2천657m)’봉이 우뚝 솟아있는 아래쪽에 빨간 지붕을 한 그림 같은 ‘티레서(Tireser·2천440m)’산장이 우리를 반긴다. 입구에 헤진 등산화와 목각으로 만든 등산화에 꽃을 심어 장식한 재미난 산장에 많은 트레커들과 라이더들이 함께 어울려 음식을 즐긴다. 풍광과 산장 분위기는 최상인데 짠 음식 때문에 방전된 체력을 보충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 아쉽다. 뒤돌아봐도 환상적인 그림인 빨간 지붕 산장과 신(神)이 조각한 기암절벽의 암릉(岩陵)과 흰 구름, 파란 하늘을 뒤로 한 채 길게 이어지는 산길을 하염없이 내려간다. ‘파노라마’산장까지 2시간여를 오르락내리락하며 진땀을 흘린다. 케이블카를 놓치면 낭패일 수가 있어 속도를 내다보니 모두들 힘들어한다. 가까스로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온다.

대기하던 택시를 타고 인구 1천800명이 산다는 산악마을 ‘카나제이’에 있는 ‘아스토리아(Astoria)호텔’에 여장을 풀고 2일차 일정을 마쳤다.

돌로미티 트레킹 3일차(6월29일) 시작점인 ‘사스 포르도이(Sass Pordoi·2천950m)로 가는 케이블카(700m 직벽을 4분 만에 오르는)를 타기 위해 지그재그 산악도로를 40여 분 간다. 가파른 산악도로에 싸이클 라이더들이 힘겹게 오르는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돌로미티의 테라스’라 일컫는 ‘사스 포르도이’는 포르도이 산군중 가장 높은 곳이며 360도 시야가 트여 최고의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1877년에 이곳에서 태어난 ‘마리아 피아즈(Maria Piaz)‘가 아들과 함께 돌로미티 최초의 케이블카인 ‘사스 포르도이 케이블카’를 건설하여 돌로미티 관광사업에 선구자 역할을 한 그녀의 이름을 따서 ‘마리아 산장’이라 부르며 산장 입구에 그녀의 목각 입상이 눈에 띈다.

여기서 보이는 마르몰라다, 사소롱고, 셀라, 칸타나치오봉(峰) 등은 수억년 전 바다에서 융기된 것으로 돌로미티 생성과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마리아산장에서 ‘보에(Boe·2천871m)’산장까지 4시간 걸려 왕복하는 코스가 오늘의 일정이다. 돌로미티의 속살이 들어나는 황량한 트레일에 봄철에 내린 눈이 녹지 않은 하얀 설원을 조심스럽게 밟고 지나간다. 풀 한 포기 없는 설사면(雪斜面)을 건너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목도 축이고 소주 한 모금도 해본다. 알싸한 청량감에 정신이 맑아지고 멀리 보이는 설산들이 더욱 또렷해 보인다. 길목에 세워진 케룬(돌탑) 중앙이 둥글게 파이고 맨 위에 올려 놓은 백운석이 성모마리아나 관세음보살같기도 한 특이한 돌탑이 신기하다. 케룬 앞에서 오늘(6월29일) 회갑 생일을 맞은 박의룡 부회장을 위한 퍼레이드로 스틱을 높이 들고 모두들 축하의 환호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풍광 좋은 곳, 돌로미티에서 생일 축하를 받은 박 부회장 부부가 감격해 하고 함께한 우리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보에’산장에서 다시 ‘마리아’산장으로 힘든 눈길을 건너 돌아왔다. 중간 경유지인 ‘포르셀라(Forcela·2천829m)’산장에서 만난 젊은 부부가 애기를 들쳐 메고 웃고 있는 모습이 생경스럽다. 급경사가 힘들게 했지만 아무도 뒤쳐지지 않고 무사히 끝맺음을 한다. 호텔로 돌아와 박 부회장 회갑잔치를 레스토랑에서 마련한 케익과 촛불 그리고 진한 레드와인으로 다함께 축하하며 즐겁게 보냈다. 아름다운 곳에서 정다운 사람들과 함께한 축하연이 유별하게 멋져 보인 밤이었다.

/김유복 경북산악연맹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