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백 겸

영화감독이 메가폰으로 컷을 선언하고 배우들이 방금 전 연기했던 영화 스토리를

까마득하게 지우는 순간이 왔다

죽음이 사형 집행인처럼 도끼를 들어 거울의 목을 쳤다

거울 공간이 깨지고 어둠의 비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거울 시간이 깨지고 암흑물질이 노아 홍수처럼 세상을 가라앉혔다

거울이 비추었던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던 풍경이 캄캄하게 지워졌다

하늘 아래 모든 풍경을 기호 인드라망으로 엮은

중중무한(重重無限)꿈이라는 거울

구중궁궐 꿈이라는 거울

우리 시대는 거울의 시대가 아닐까. 어쩌면 거울에 반사되고 복제된 이미지에 얽매여 사는 것인지 모른다. 진정성이나 진실을 거울 뒤에 숨겨져 있고 거울이라는 갇힌 공간 속에서 소위 ‘기호 인드라망’에 갇혀 있다고 생각하는 시인은 거울을 깨고 거울 뒤로 사라진 진실한 언어, 영혼을 불러내고 있는 것이리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