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2년에 나서 1611년에 세상을 떠난 일본 구마모토의 다이묘(大名)다. 우리한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을 침공해 들어온 적장으로 악명이 더 높다.

원래 도요토미의 먼 친척이라 하며 그가 일본의 패권을 쥘 때 전공을 세우면서 유명해졌다 한다. 그건 일본에서 일이고 한국에 와서는 조선 사람 살상하는 일로 큰일을 했다. 듣자하니 얼마나 공을 세웠나 하는 것은 사람 목을 얼마나 벴나 하는 것, 머리를 베어 보내려면 부피가 크니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숫자를 셀 때까지 잘 보관되록 했다 한다. 제2차 진주성 싸움 때는 기어코 성을 무너뜨려 관군과 의병, 백성들 합쳐 6만 명이나 해쳤다 하니 그 잔인함을 가히 알 만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제1부대 선봉장이었지만 원래 기독교를 믿는 데다 장사꾼 출신이라 그런지 줄곧 화친을 도모했다 하고 애초에도 전쟁에 반대했다고도 한다. 그가 가토 기요마사와 사이가 좋지 않았을 것은 뻔한 이치. 서울에 들어올 때도 고니시가 먼저 들어온 것을 공을 다투려 애매하게 문서를 꾸려 본국에 보냈다 들통 나는 바람에 이를 드러낸 자와 원수지간이 됐다고도 하고. 함경도에 가서는 호랑이 사냥을 즐겨 ‘호랑이 가토’라는 별명까지 붙었다고도 한다. 그 용맹함이 곧 잔인함이었던 모양이다. 그런데도 구마모토 현에서는 그를 영웅으로 기려 구마모토 성 아래 미유키 다리 옆에 ‘가토 공’의 흉상이 서 있고 성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도 ‘가토 신사’까지 차려져 있다.

이 가토가 그러면 임진왜란 중에 계속 그렇게 조선 사람 죽이는 일에만 신명을 냈느냐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 자신도 죽을 뻔한 고비를 여러 번 넘긴 것도 같은데, 장덕산 대첩의 정문부 장군한테도 꽤나 혼났던 것 같고, 서생포와 울산 학성에 왜성을 짓고‘진지전’을 벌일 때는 우물이 없는 학성에서 명나라 군사와 조선 관군에 포위된 채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친 끝에 죽음의 그림자까지 느낄 지경에 이르기까지 했다 한다. 그때 너무 혼이 난 바람에 오사카 성과 나고야 성에 이어 일본의 3대 성으로 이름난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성내에 우물을 120개나 파고 은행나무를 심어 비상시에 먹을 것으로 쓰게 하려고까지 했다니, 가히 알 만한 일이다.

그래도 목숨 줄이 길어 조선에서 살아나가 나중에는 세상 떠난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을 배신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쓰 편에 서서 복록을 누렸다 한다. 사세가 이미 기울었던 탓도 크겠지만 본래 머리 쓰는 사람들은 손바닥을 잘, 자주 뒤집는 법이다.

같은 사람도 이곳에서는 악인이 저곳에서는 영웅이 되는 것이 세상의 어두운 이치다. 이번에 한국전통 시가 시조를 알리는 일로 바다 건너간 구마모토에서 뜻밖에 ‘명장’ 가토 기요마사를 만났기에 하는 생각이다. 그게 어디,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만 그렇던가. 같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정파마다, 세대마다, 이해관계 따라 참으로 위아래가 다르고 옳고 그름이 다르다. 안쓰러운 세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