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젊은 날 즐겨 불렀던 노래 가운데 ‘이 산하에’가 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1919년 3·1운동, 1930년대 만주의 항일 무장투쟁을 내용으로 하는 3절 노래다. 형언하기 어려울 만큼 아프고 괴로웠지만, 눈부시게 빛났던 1987년 어느 여름날 새벽 거리에서 그 노래를 처음 들었다. 가사에 담긴 근현대 한국역사의 질곡과 해방을 절절하게 담아낸 ‘이 산하에’. 완창(完唱)하려면 10분도 넘게 걸리는 이 노래에 빠져든 것은 20대 청춘의 당연한 귀결이었다.

유학시절 베를린 공대건물 야경꾼으로 일하러 가는 길에 나지막하게 부르곤 했던 ‘이 산하에’. 그것은 힘들고 지친 나를 위로하고, 주저앉거나 포기하는 것을 막아주는 든든한 요새이기도 했다. 귀국한 뒤에도 불렀던 노래는 제도적 민주화 성취와 평화적 정권교체 등으로 서서히 망각된다. 그러하되 언뜻언뜻 노랫말이 생각나 흥얼거렸던 ‘이 산하에’. 지난 11일 제1회 동학농민혁명 기념식이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虐政)과 탐욕, 가렴주구로 일어난 민란의 형태로 동학농민전쟁은 불타오른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는 ‘인내천’ 사상으로 무장한 녹두장군 전봉준은 일개 탐관오리 조병갑의 척살(擲殺)을 넘어서는 대의를 생각한다. 제세안민(濟世安民), 축멸왜이(逐滅倭夷), 진멸권귀(盡滅權貴) 등이 그것이다.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며, 왜놈 오랑캐를 몰아내 박멸하고, 권세 있는 부귀한 자들을 멸절(滅絶)시키겠다는 내용이다.

전봉준을 수장으로 하는 동학농민군은 1894년 5월 11일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관군에게 대승을 거둔다. 전봉준은 여세를 몰아 북접의 손병희와 함께 한양으로 진군한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그해 11월 공주 인근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전봉준은 체포되고 만다. 동학농민전쟁 시기에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의 운명은 백척간두에 서게 된다. 이후의 역사는 독자 여러분 모두가 아시는 바와 같다.

2019년 5월 11일 기념식에서 이낙연 총리는 125년 만에 정당하게 역사적인 평가를 받은 동학농민혁명을 여러 갈래로 회고한다. 그는 동학농민혁명이 프랑스 대혁명 같은 서유럽의 근대혁명에 버금가는 대규모 민중항쟁이자 반봉건 민주주의 운동임을 밝힌다. 당시 동학농민들은 부패한 지배세력과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를 철폐하고 양반과 상민, 주인과 노비, 남자와 여자의 차별이 없는 사회를 만들려했다고 덧붙인다.

이 총리는 동학농민혁명이 반외세 민족주의 운동임을 강조한다. 청일전쟁 승리를 바탕으로 경복궁을 무단 점거하고 국정을 농단하던 일본세력을 축출하려는 운동이 동학농민전쟁임을 말하는 것이다. 나아가 그는 동학농민혁명이 불붙인 민족의식을 지적한다. 기미년 3·1 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동학교도는 15인, 그 가운데 9인이 농민전쟁 참가자였다.

동학농민운동 정신은 연면부절(連綿不絶)하게 이어져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월 항쟁으로 나타난다. 국가가 누란(累卵)의 위기에 놓일 때 민초들이 동학농민들의 잠재적 후예로 출현하여 나라를 구해낸 것이다. 반외세 민족주의 운동이나 반독재 민주주의 투쟁으로 외연을 확장해온 동학농민운동. 그런 뜻깊은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되살려내는 작업은 우리의 어린것들과 미래를 위해서도 적실(適實)한 일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개인과 사회, 공동체는 반드시 절멸한다. 패배와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자는 끝내 파멸의 나락과 대면한다. 그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내려주는 선물이다. 승리와 패배, 성공과 실패, 영광과 오욕(汚辱)은 기실 종이 한 장 차이일 뿐! 장쾌한 역사적 안목과 통찰을 가지고 우리의 어제와 오늘을 돌아보고, 내일을 기획하는 것이야말로 21세기 우리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