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희 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아버지는 길에서 가셨다. 일하던 곳이 길이었고, 쉬는 곳 또한 길이었다. 그래서인가. 그 곳에서 또 다른 길로 가버렸다. 아버지는 청소부였다. 이른 새벽 청소차를 뒤따르며 길을 쓸었다. 손톱과 손가락의 경계가 선명해서, 길 위에 선 아버지와 보행도로를 걷는 사람들을 구분지었다.

‘아버지’ 하고 몇 번이나 불렀던가? 지금 생각해보아도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다. 집에서도 멀찍이 앉았고, 눈 한 번 제대로 맞춰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늘 혼자였다. 아버지와 얘기하는 사람은 막내동생 뿐이었다. 아버지는 나이가 어린 막내에게는 무동과 말이 되는 놀이터였다. 점방에 갈 수 있게 해주는 돈주머니였고, 흙투성이로 집에 돌아와 엄마의 꾸중, 잔소리로부터 숨을 곳이었다. 그것도 막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였다.

다음으로 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사람은 엄마였다. 두 분의 대화는 독특했다. 새벽부터 잠들 때까지 눈만 마주치면 다투었다. 귓바퀴에 먼지가 가득하니 씻어라, 남들이 내 욕한다며 엄마가 내뱉으면 아침부터 잔소리라며 눈을 부라렸다. 밥 먹을 때 쩝쩝거리지 말라하면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며 더 소리를 냈다. 싸울 때만 쿵짝이 맞을 뿐 사이가 좋은 적은 없었다. 방에 누워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짐을 했다. 결혼하지 말아야지, 만약에 하더라도 부부싸움은 하지 않아야지, 아이들 앞에서는 절대로 절대로.

길에서 아버지를 마주칠 때면 나는 얼른 골목길로 숨어들었다. 아버지도 못된 딸이 피하는 걸 아는지 불러 세운 적이 없었다. 친구들이 알아볼까 두려웠다. 내가 하던 거짓말이 들통날까 겁이 났다. 멀리 아버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꼭꼭 숨어있었다.

그날은 숨을 수가 없었다. 집이 싫었던 나는 교회에서 늦게까지 청년부 일을 도맡곤 했다. 늦은 밤 같은 부서 후배가 나를 집까지 바래준다고 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걸었다. 산 중턱에 자리한 우리 집이 가까워진다는 걸 밤공기에 묻어나는 아카시아 향기로 알 수 있었다. 간간히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로도 느껴졌다.

저만치에 짐자전거 한 대가 휘청거리며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빈자전거를 끌고 가기에도 숨이 턱에 차는 오르막이었다. 자전거 뒤에 종이상자며 고철덩이가 잔뜩 실려 있어서 헉헉 소리만 들려 올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옆에 걷던 후배가 뛰어 가더니 뒤에서 힘껏 밀었다. 나에게도 손짓했다. 나는 그 자리에 멈췄다. 멀리서도 한 눈에 자전거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산에서 울어대는 소쩍새울음에 내 심장소리가 묻히길 바라며, 어둠이 나를 숨겨주길 바랐다.

아버지는 날 좋은 봄에 가셨다. 뺑소니 사고였다.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쫓아온 할머니의 통곡소리가 밤새 끊이지 않았다. 방바닥을 내리치며 우시다가 자식을 잡아먹었다며 며느리에게 욕을 해댔다. 할아버지는 마른 헛기침으로 시끄럽다며 역정을 내는 걸로 아들의 죽음을 슬퍼했다. 정신없이 하루가 지났다. 초상을 치러야 하니 아픈 아이를 시어머님께 맡겼다. 모유를 먹이던 터라 삼우까지 지내려면 젖을 뗄 수밖에 없었다. 약국에 가서 젖 삭히는 약을 샀다. 하지만 한 번도 먹지 않았다. 매일 줄줄 흐르던 젖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숙모들이 옆에서 아기가 입을 대지 않으면 젖이 잘 마른다고 거들었다. 그런 줄 알았다.

둘째를 낳아 기르며 두 돌이 다 될 때까지 젖을 물렸다. 젖을 떼려고 삭히는 약을 지어먹었다. 엄마가 일러주는 대로 엿질금을 앉혀 먹어도 보았다. 가슴이 아파 얼린 양배추로 열을 식히며 선잠을 잤다. 보름 정도가 지날 때까지 젖이 자꾸만 불어서 물 한모금도 아껴 마셨다. 아버지 가실 때가 생각났다. 그 때는 아무런 통증도 없이 삭아진 젖멍울이었다. 멍울이 사그라질 때까지 실컷 울었다. 아버지 생각을 하면 길이 떠오른다. 기우뚱거리는 자전거가 보인다. 한 번도 아버지 곁에 선 적이 없었던 소녀가 가로등 그림자 뒤에 숨어있는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