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형의 영화 읽기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 ‘모스트 원티드 맨’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사소한 즐거움을 위해 던진 사표

뒤늦은 나이에 홍보담당으로 7년여의 직장생활을 경험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 몇 년간의 직장생활은 좋았다. 금전적인 안정과 ‘이것도 경험’이라는 배짱과 적지 않은 역사를 가진 회사의 체계적으로 갖추어진 편리한 시스템과 직장 문화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무엇보다 피로가 누적되고 한번쯤 딴 생각을 할 시점에 정확하게 통장으로 입금되는 급여가 달콤했다. 거기다 내가 회사를 선택한게 아니라 회사가 나를 선택했으니 언제든 왔던 곳(들판)으로 돌아갈 마음의 각오가 되어 있었다.

횟수를 거듭할수록 자신있고 당당했던 들판의 정서가 옅어지고, 승진을 거듭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인간관계와 묶여 있다는 강박관념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간 정확하게 지켜졌던 정시출근·정시퇴근과 휴일의 자유로움이 침해받으면서 안정된 생활과 들판의 기질이 수시로 부딪치고 있었다.

저녁 여섯 시, 피곤한 어깨를 주무르며 퇴근길에서 듣던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없는 나날이 많이지면서 ‘사표’를 던져야한다는 울림은 커져만 갔다. 퇴근길 운전하며 즐겨 듣는 라디오 방송을 들을만큼의 사소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더 나은 삶이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나에겐 특별한 계획이나 더 나은 자리에 대한 약속이 없었다. 그저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더 이상 몸과 마음이 망가지기 이전에 고단한 직장생활의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사직의사를 전하고 사직서가 수리되기까지 한달여 동안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은 황폐했으며, 갑상선 기능 항진증 등 몸엔 이상 반응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돌아가고 싶었던 ‘들판’은 여느 직장인들이 꿈꾸는 일탈과 희망의 장소가 아니었다. 근사한 여행의 계획도, 평소 하지 못했던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자유의지로 분주한 삶을 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묶이지 않는, 알람이 울리지 않는 아침과 의무적으로 해야할 약속이 없음과 2천여 명의 직장동료와 같은 시간의 궤적(삶의 궤적까지)을 그리고 싶지 않았다.

지극히 나의 전공과 맞았으며, 여느 동료들보다 상대적인 자유로움을 가졌던 직장생활이었으며, 드라마틱한 순간과 이색적인 체험의 순간이었던 직장이었지만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오게 된 이유는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겪었으며 겪고 있을 지극히 현실적인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했음이다. 화려하고 이상적인, 신비롭고 은밀한 직업, ‘직장인으로서의 스파이’를 보여주는 두 편의 영화를 이야기하고자 개인적인 이야기를 먼저 꺼내게 되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직장인의 해고, 그리고 사내 정치

이번 ‘영화 읽기’에 소개할 두 편의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모스트 원티드 맨’은 첩보소설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존 르카레’의 소설을 영화화 한 것이다.

존 르카레는 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SIS, Secret Intelligence Service) 출신으로 MI6(영화 007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가 소속된 정보기관으로 영국의 대외 정보를 담당하고 있다)에서 근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비밀정보요원 신분으로 소설작가로서 일을 병행하고 있던 르카레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가 흥행을 하게되면서 전업작가로 나서게 된다. 그의 소설처럼 두 편의 영화엔 화려한 액션이나 박진감 넘치는 작전,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며 시선을 빼앗는 풍광도 스파이를 유혹하는 아름다운 여성도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썩은 사과가 있네 짐. 찾아서 도려내야해” 영국 비밀정보부(MI6) 국장인 ‘컨트롤’은 ‘짐 프리도’에게 조직(서커스)내 침투한 러시안 스파이(두더지)를 밝혀내기 위한 비밀임무를 맡긴다. 그러나 작전의 실패로 인해 책임을 지고 ‘컨트롤’은 조직에서 물러나게 되고, 그의 오른팔이었던 ‘조지 스마일리’는 해고 당한다. 스파이의 해고. 여느 직장인의 해고와 다르지 않다. 조용히 책상을 정리하고 쓸쓸히 다니던 직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온다. 그 이후의 일상은 습관처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갑자기 찾아 온 넉넉한 시간과 특별한 목적없는 일상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영화 전반부를 채우고 있다. 이후 은퇴한 스파이 ‘조지 스마일리’에게 서커스 내에 침투한 러시아의 이중 스파이를 색출해달라는 임무를 맡기를 맡긴다.

1960년대 미소 냉전시대 첩보전이 심화되던 당시, 영국 케임브리지 출신 엘리트들의 소련 이중간첩 사건인 ‘5명의 고리(Rings of five)’라고 불리는 실제 사건을 존 르카레가 소설로 재구성했고, 이 원작이 바탕이 된 영화엔 그간 봐왔던 스파이의 첨단 무기나 액션, 스릴있게 펼쳐지는 긴장감과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반전은 없다. 서류를 챙기고, 보고하고, 분석하고, 점심 메뉴를 고민하고, 승진을 위해 동료를 견제하는 자잘한 직장 내의 정치가 있을뿐이다. 인정을 받고 승진을 위해 노력하고 노후를 위해 스트레스를 참고 직장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직장인의 애환으로 보여질만큼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여느 첩보물과는 다른 결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 존 르카레의 실제 직업 경험에서 나왔던 전문 용어와 은어들, “원작을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방대한 분량의 원작을 축약해서 보여주며 전혀 친절하지 않은 전개 탓에 더욱 더 낯설고 지루하게 볼 수도 있다. 또한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성, 동성, 양성의 성적정체성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설정을 간단하고 은유적으로 처리해 버림으로써 영화의 이해를 쉽지 않게 만들고 있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무슨 영화적 재미를 지니고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역설적으로 단 하나의 장면과 대사도 놓칠 수 없는 빡빡한 구성으로 이루어졌다는 의미도 된다.

등장인물들의 성적 정체성은 동료이며 연인으로, 적으로 그 위치를 바꿔가며 영화를 또 다른 차원에서 읽을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주고 있다. 영화 전체에서 딱 네 발의 총성이 울리고, 세 명의 남자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이 이 영화를 첩보물이며, 연애담(혹은 치정극)으로 읽고 느낄 수 있는 장치들이다.

마지막에 이중 간첩이 밝혀지고 스마일리는 그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에 이중 간첩은 “도덕적 선택 못지 않은 미학적 선택”을 했다고 말한다. 여기서 ‘도덕적 선택’은 이념과 애국심 사이의 선택이었으며, 또 다른 선택의 요인으로 애정의 문제를 고려한 선택, 복잡하고도 미묘했던 순간의 ‘미학적 선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긴말 필요없이 단순하게 이 영화의 구조는 ‘집 나간 아내의 구구절절한 사연’으로 시작하여 ‘집 나간 아내가 돌아왔다’고 표현해도 될 것이다.

스파이, 특급비밀, 첩보활동, 은어들이 난무하는 영화 속에서 직장인의 애환과 애정사를 배치할 때, 영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1970년대의 냉전 속에서, 나와 다른 직업을 가진 직장인의 애환이 겹쳐지며 묘한 매력과 다양한 퍼즐 맞추기의 재미를 선사하는 영화 읽기가 된다. 이 모든 것들을 매끄럽게 끌어가고 있는 것으로 존 허트, 게리 올드만,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톰 하디, 베네딕트 컴버배치까지 쟁쟁한 배우들의 말끔한 연기가 한몫을 하고 있다. 이 영화가 주는 또 다른 매력이다.

‘모스트 원티드 맨’
‘모스트 원티드 맨’

△결재서류에 사인하는 순간이 주는 극도의 긴장감

역시 존 르카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영화 ‘모스트 원티드 맨’은 ‘2001년 모하마드 아타는 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911 테러를 구상, 계획하고 정보 수급 실패와 부처간 경쟁 탓에 별다른 방해 없이 공격을 시행하게 된다. 현재까지 함부르크는 주요 경계 도시로 분류돼 2001년의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독일 및 국제 정보기관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자막과 함께 시작된다.

미소 냉전시대가 저물고 주적이 서방과 아랍으로 대치되었다. 전쟁의 위협에서 테러의 위협으로 갈등의 양상은 전이 되었고, 내부의 적을 향하던 사건의 전개는 외부의 적을 향한 확신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 역시 화려한 액션이나, 첨단 무기, 탄탄한 몸매와 외모를 자랑하는 스파이와 풍성한 볼거리는 제공하지 않는다. 그나마 몇 발의 총성이 울렸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 비해 단 한 발의 총성도 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여느 첩보영화 못지 않은 극도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는데, 한 발의 총성보다 서류에 사인하는 것이 더 긴장감 있음을 보여주는 영화다.

<E630><E631> 팅커테일러 솔저 스파이,  ③<E633> ‘모스트 원티드 맨’.
팅커테일러 솔저 스파이, ③ ‘모스트 원티드 맨’.

독일 최고의 스파이였으나 좌천되어 정보부 소속 비밀조직의 수장인 군터 바흐만. 정보원을 미끼로 대어를 낚는 탁월한 재능을 가진 그에게 함부르크로 밀항한 무슬림 청년이 나타나고, 이를 통해 대어를 낚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간명한 스토리만큼 영화는 직선적이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처럼 은유적이지 않고, 친절한 설명이 필요할 만큼 복잡하지도 않다. 바로 이 직선적이고 간명함이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힘이며, 극도의 긴장감을 유발하는 원동력이다. 가장 현실적인 스파이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면서도 ‘직장인으로서의 스파이’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연기한 군터 바흐만의 뒷모습은 일상의 피곤함에 찌들려 퇴근하는 직장인의 쓸쓸한 뒷모습과 닮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단독 주연한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저녁이 있는 삶’을

지금도 즐겨 듣는 저녁 6시 라디오 방송프로의 오프닝 멘트에서 언제였던가 “우리를 위로하러 날마다 저녁이 오고 있다”는 대목을 들었을 때의 벅차오름을 기억하고 있다. 이 땅의 모든 첩보원과 직장인에게 ‘저녁이 있는 삶’을 살고 계신지,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습니다”로 시작하는 라디오 오프닝 멘트와 ‘세상의 모든 음악’을 보낸다. /김규형 문화기획사 엔진42대표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안톤 코르빈 감독의 ‘모스트 원티드 맨’은 네이버영화나 구글플레이에서 다운로드하여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