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수백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부
서수백 대구가톨릭대 교수·한국어문학부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 공부가 어떠냐고 물으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는 말이 있다. “어렵지만 재미있어요”이다. 그렇다. 한국어는 어렵지만 재미있는 언어다.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가 한국어는 비슷한 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얻다’와 ‘받다’, ‘인간’과 ‘사람’, ‘모든’과 ‘온갖’, ‘놓다’와 ‘두다’, ‘달리다’와 ‘뛰다’, ‘한가하다’와 ‘여유롭다’, ‘바라보다’와 ‘쳐다보다’ 등등 수많은 유의어들을 구별하여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외국인들에게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어의 묘미에서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언어에 민감하고 섬세한지를 알 수 있다.

한국어 단어 중 ‘운명’과 ‘기적’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두 단어의 명확한 의미 차이를 말하기가 쉽지 않다. ‘운명’이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는 것’이라면 ‘기적’은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치도 못하였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다. ‘운명’과 ‘기적’이 모두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신의 섭리’라는 뜻이라면 두 단어는 유의성이 충분하다.

이 세상에 ‘운명이나 기적 따위는 없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生)에 ‘운명’의 가혹함과 ‘기적’의 짜릿함은 함께 존재하는 듯하다. 그래서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果應報)’,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란 말도 우리의 운명 같은 인생, 기적 같은 인생에서 생겨난 말일 것이다. 삶에서 ‘운명 같은 일’은 곧 ‘기적 같은 일’이 될 때가 참으로 많은 듯하다.

‘기적’은 대부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으로 귀결되고 그것은 현실적인 결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나 때때로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는 가혹한 현실을 ‘운명이었다’라고 단정해 버리기도 하고, 누구도 헤아리지 못하는 인내와 노력의 현실을 ‘기적이다’라고 그 가치를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 4강 진출은 ‘신화(神話)’라고 할 만큼 큰 ‘기적’이었다. 그러나 그 기적같은 결과는 히딩크 감독의 뛰어난 지략(智略)과 선수들의 피나는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데 우리 스스로 한 목소리를 내었다. ‘한강의 기적’도 마찬가지다. 살고자 했던, 살리고자 했던 우리 모두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치러진 창원 지역 ‘4·3 보궐 선거’는 또 한번 삶의 ‘운명 같은 일’, ‘기적 같은 일’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정치적인 해석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창원 성산구는 고(故) 노회찬 의원의 지역구이기도 해서인지 왠지 관심이 더 갔다. 늦은 시간까지 박빙(薄氷)의 투표차를 지켜보다 가슴 졸이는 심리적 스트레스를 피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아침 ‘4·3 보궐선거는 여야(與野)의 무승부 결과’라는 보도를 보았다. 박빙의 상황에서 역전(逆轉)이 일어난 것이다. 당락(當落)을 결정한 표차는 단 504표다. 선거 전부터 알려진 여론조사의 결과와 달랐다. 당선 결과에 대한 정의당 의원들의 세리머니(ceremony)가 여느 선거 때와는 달라 보였다.

내 감정이 너무 이입되어서일까? 그들은 ‘기적’과 ‘운명’을 가슴 깊이 체감한 듯했다. 그리고 현실을 잘 살아가고자 하는 다짐도 보였다. ‘운명’과 ‘기적’ 속에 수많은 해석을 하며 깨닫고 다시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였을 것이다.

우리는 ‘운명’과 ‘기적’ 사이에서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그 속에 우리가 장담할 수 있는 ‘운명’이나 ‘기적’은 없다. ‘운명’과 ‘기적’이 ‘현실’의 반의어도 아니다. 때문에 현실을 살아가는 가운데 ‘운명’과 ‘기적’을 삶의 ‘핑계’나 ‘행운’쯤으로 여기며 그것으로 자신의 삶을 합리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실을 충실히 잘 살아낼 때 진정으로 ‘운명’과 ‘기적’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운명’과 ‘기적’의 체험이 우리를 날마다 살아가게 하는 힘인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