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신라정신의 원류와 본질을 찾아서
황룡사지, 폐허에 서다

상공에서 바라본 황룡사지의 모습. 가운데 보이는 곳이 황룡사 9층 목탑 터인데 지름 1m 내외의 초석 64개가 현재도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고, 가운데에 크게 보이는 부분이 심초석(心礎石)이다. 목탑 터 뒤쪽이 삼존불을 모셨던 금당 터이다. /이용선기자

경주에 다녀온 뒤 만나는 사람마다 잡고 말했다.

“경주에 갈 일이 있다면, 황룡사지는 꼭 가 보세요!”

겨울이고, 저물녘이라 더욱 그랬을 것이다. 봄이나 여름이나 가을이고, 새벽이나 한낮이라도 나름의 정취는 고스란했을 것이다. 예술품에 ‘완벽하다’는 말이 쓰일 수 있다면 석굴암에 그러할 것이라 했는데, 폐허에 ‘완벽하다’는 말을 쓸 수 있다면 황룡사지에 그럴 것이다. 폐허가 완벽하다니, 짐짓 ‘형용모순’ 같기도 하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황폐한 터,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음과 텅 비어있음이 결함 없이 완전하다는 느낌을 준다. 나처럼 웬만한 풍광이나 경치에 눈도 꿈쩍 않는 시큰둥이 목석에게 이 정도의 감흥을 준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텅 비어있는데 가득 찬 느낌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무언가를 보고 만 기분이다. 막막하면서 먹먹하다. 문득 가슴이 뻐개지듯 저려와 눈물이 왈칵 솟을 듯했다. 천년의 시간이 천년의 공간과 만난다. 세계와 인간의 명멸과 왕조와 문화의 흥망성쇠가 한꺼번에 물밀어든다. 온갖 호들갑스러운 표현을 총동원해도 그곳의 그 느낌은 붓과 혀로 다할 수 없다.

그냥, 가 보시라. 황룡사지, 그토록 완벽한 폐허.

“(진흥왕)14년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계획을) 바꾸어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皇龍)이라고 하였다.”(‘삼국사기’)

“신라 제24대 진흥왕 즉위 14년 계유 2월 장차 궁궐을 용궁(龍宮:신라의 궁궐 이름으로 추정)의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나서 이에 고쳐서 절을 짓고 황룡사(黃龍寺)라고 하였다. 기축년(569년)에 이르러 담을 두르고 17년 만에 바야흐로 완성하였다.”(‘삼국유사’)

 

중앙을 의미하는 ‘황룡’
8만여㎡ 규모의 ‘황룡사지’ 
신라 최대 건축물 ‘황룡사’
80m 최고 높이의 ‘9층 목탑’ 등
폐허에 남겨진 화려한 역사 떠올라

처음부터 절을 지으려던 것은 아니었다. 아마도 월성이 좁았거나 다른 필요가 생겨 새 궁궐을 짓기로 결정했던 게다. 그런데 막상 궁궐을 짓기 위해 터를 닦으려던 차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문득 황룡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몸은 뱀, 뿔은 사슴, 귀는 소 같고 비늘과 네 개의 발을 가진다. 용은 오방(五方) 오색(五色)의 다섯 형태로 나타난다. 동의 청룡(靑龍), 남의 적룡(赤龍), 서의 백룡(白龍), 북의 흑룡(黑龍), 그리고 중앙에 황룡(黃龍)이 있어 모두 오룡(五龍)이다. 한국에서는 오룡 가운데 청룡이 가장 많이 그려지는데, 청룡은 봄을 관장하며 기우제에 상징물이기에 농경 사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용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쩌다 황룡이 나타났을까? 왜 하필이면 청룡도 백룡도 흑룡도 적룡도 아닌 황룡일까?

황룡은 동서남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중앙을 의미한다. 왕조시대의 중앙, 세상의 중심은 왕이다. 따라서 황룡은 임금, 군주에게만 사용되는 특권적인 용이다. 진흥왕이 짓고자 했던 신궁은 왕궁이니 황룡이 나타남직하다. 또한 불교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는 다양한 용들 가운데 석가모니는 반드시 황룡으로 상징하기에, 불교를 국교로 삼은 신라에서 황룡은 특히 신성시되었을 것 이다.

계획도시 건설 시기에 대한 이견은 있지만 삼국 가운데 유일하게 천도가 없었던 신라는 황룡사를 지은 5세기 중후반부터 도성의 확장을 시도한다. 문제는 황룡이 나타나는 바람에 궁궐을 지을 자리에 절을 짓게 된 것이다. 신궁 건설 계획이 무산된 이유로는, 용이 깊은 못이나 늪, 호수, 바다 등 물속에서 사는 동물이라는 데서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황룡사지를 조사한 결과 일대의 저습지가 대대적으로 매립된 흔적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고층 아파트에 살면서도 수맥이 지나가네 마네 하는 터에 물이 고인 연못 위에 왕궁을 짓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황룡사지의 규모는 8만여㎡에 달한다. 신궁을 만들기 위한 지반 매립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지만 빈 터로 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월성의 주인들은 그 위에 신라 최대의 사찰, 국찰 황룡사는 짓는다. 13년 혹은 16년 동안 공사하여 완공하고, 아육왕(아소카왕)이 보낸 금과 철로 장육존상(丈六尊像)을 만들고, 금당(金堂)과 9층 목탑을 조성한다.

황룡사는 신라 왕실의 상징이 된다. 변괴가 있으면 장육존이 눈물을 흘리고, 커다란 별이 황룡사와 월성 사이에 떨어지고, 큰 바람이 황룡사의 불전을 무너뜨리고, 벼락이 쳐 탑이 흔들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황룡사는 단순한 사찰이 아니라 신라 그 자체다. 927년 3월, 황룡사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운다. 927년 후백제의 침공으로 경애왕이 죽고,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견훤에 의해 즉위한다.

황룡사지 한 귀퉁이에 있는 ‘황룡사 역사문화관’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건물이다. 3천 원짜리 입장권을 내고 들어가자마자 안내원이 건네주는 안경을 끼고 영상관에 들어가 3D 영상부터 본다. 황룡사의 건립부터 화재로 소실되기까지의 과정을 내용으로 한 영상이다. 나름 정성을 들여 만들었는데 아무래도 비장미가 과한 느낌이다. 몽골군이 황룡사를 공격해 불태우는 장면에서 승려들이 마치 소림사 무예승처럼 싸움을 벌이는데, 내 안의 민족주의가 자극되어 순간 울컥했지만 실제 역사와는 거리가 있다.

 

황룡사지 한 귀퉁이에 있는 황룡사 역사문화관 1층에는 10분의 1로 축소 복원된 9층 목탑이 전시되어 있다.  /이용선 기자 photokid@kbmaeil.com
황룡사지 한 귀퉁이에 있는 황룡사 역사문화관 1층에는 10분의 1로 축소 복원된 9층 목탑이 전시되어 있다. /이용선 기자 photokid@kbmaeil.com

삼국시대부터 승병의 역사가 있으니 무예를 하는 승려도 있었겠지만, 때는 신라 폐망 이후의 고려시대로 황룡사의 위상도 많이 퇴색했을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다른 누구도 아닌 몽골군이다. 그들은 지배하지 않는다. 다만 약탈하고 유린하고 떠난다. 저항하는 자가 있으면 그 지역의 사람 전부를 죽여 버린다. 전 세계를 휩쓴 몽골군의 용맹 혹은 야만은 그들이 지나간 자리를 전부 폐허로 만들 정도였다. 아마도 황룡사는 조용히, 빠르게,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다. 거짓말처럼.

영상관에서 나와 잘 꾸며진 목탑실과 역사실, 고건축실 등을 둘러본다. 전시물들은 황룡사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고 그간의 연구와 복원계획까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황룡사는 여러 면에서 대단한 절이었다. 황룡사 지붕을 장식했던 치미를 복원한 모형만 보아도 그 거대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황룡사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9층 목탑인데, 문화관 1층 전시장에 10분의 1로 축소 복원되어 있다. 이 모형의 10배가 되는 목탑이 저 들판 한가운데 서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아득하다. 탑의 높이는 약 80m, 아파트 30층에 가깝다. 1969년 서울 서소문동에 83m의 한진빌딩(KAL빌딩)이 세워지기 전까지 한국 역사상 최고 높이 건물이었다니 할 말 다했다.

이 탑이 월성에서 덩두렷이 보였을 것이다. 불교의 탑은 석가모니의 진신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축조물로 예배의 대상이니, 아무 때나 마음이 내키면 동쪽으로 몸을 돌려 기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남산에서도 보였던 게 분명하다. 일명 부처바위로 불리는 남산의 탑곡 마애조상군에는 부처와 보살, 승려와 비천(飛天)과 사자 등과 더불어 황룡사 목탑으로 짐작되는 거대한 탑이 조각되어 있다. 그러니 서라벌 어디에서도 보였을 것이다. 새벽에 눈뜰 때부터 밤에 눈 감을 때까지 보이고, 서라벌 사람들이 길 떠났다 돌아올 때 식구보다 먼저 맞아주는 게 황룡사 목탑이었을 것이다.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운 사람은 신라, 그리고 삼한의 첫 번째 여왕인 선덕여왕이다. 선덕여왕이 목탑을 세운 것은 종교와 예술을 떠나 사뭇 절박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은 고승 안홍이 편찬한 ‘동도성립기’를 인용해 말한다.

“신라 제27대에 여왕이 왕이 되니 도(道)는 있으나 위엄이 없어 구한(九韓)이 침략하였다. 만약 용궁 남쪽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곧 이웃나라의 침입이 진압될 수 있다.”

자장이 중국에서 신인(神人)을 만나 들었다는 조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금 너희 나라는 여자가 왕이 되어 덕은 있으나 위엄은 없다. 그러므로 이웃나라가 꾀하는 것이다. 마땅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라 (중략) 본국으로 귀국하여 절 안에 9층탑을 조성하면 이웃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이 와서 조공하여 왕업이 영원히 평안할 것이다.(하략)”

우뚝 솟은 탑은 남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 하나가 없어 폄하되고 모욕당한 선덕여왕은 그보다 더 웅장한 탑으로 신라의 자존심을 지킨다. 선덕여왕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내가 가장 높은 것을 우뚝 세웠으니, 모두 우러러 보라!”

화려했던 과거를 되짚을수록 현재의 폐허는 허무로 깊어진다. 신라 최대 사찰이자 최고 건축물이었던 황룡사는 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탑과 전각이 모두 불탔다. 장육존상과 금당 벽에 그려졌다는 솔거의 ‘노송도’도 모두 녹아내렸다. 말 그대로 잿더미가 되었다.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허공을 꽉 채워 있음과 없음의, 과거와 현재의,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지운다. 역사문화관을 나와 다시 황룡사지를 걷는다. 강당지, 금당지, 서금당지, 동금당지, 목탑지, 경루지, 종루지, 중문지. 모두 사라지고 자리뿐이다. 거대한 초석들 위에 세워졌을 거대한 기둥은 온데간데없다. 사라진 영화, 사라진 신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릴 필요는 없다. 젊은 날 찾았던 이방의 유적지에서 문득 손을 모으는 내게 안내원이 말했다.

“폐허는 숭배하지 않는 것입니다.”

황룡사와 9층 목탑을 복원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앞서 2035년까지 2천900억 원을 투자해 목탑을 복원하고 금당과 회랑과 승방 등 13개 동을 차례로 건립하겠다는 계획이 수립된 바 있고, 경주시는 2019년 주요업무계획에 1천200억 원이 소요되는 황룡사 9층 목탑 복원 계획을 포함시켰다.

하지만 “지구의 복원은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 복원은 완전하고 상세한 기록에 근거할 때만 수용될 수 있으며, 절대 추측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협약 이행을 위한 운영지침’(86조)에 따라 황룡사 복원 계획은 무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자세한 그림과 문헌이 없어 고증이 어려우니 애당초 복원이 불가능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9층 목탑을 세우면 황금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찍어 SNS로 자랑하고 싶은 사람들이 몰려들 것이다. 어쨌거나 관광객 유치에는 확실한 효과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폐허는, 그 완벽한 텅 빈 듯 가득함은 사라질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마음으로 보는 심안(心眼)의 복원은 불가능할까?

몇날며칠 황룡사지 노래를 했더니 친구가 시를 만들어 보내왔다.

너는

내가 폐허처럼 드러누울 때마다

황룡사지를 가보라 한다

절이 앉았던 곳

적록 단청이 색을 벗고 공즉시색 하는 곳

9층 목각의 목을 부러뜨리고

붕새는 어디로 날아갔을까

건너편 산자락에

끝이 찢어진 날개를 내려놓고

우리가 익힐 수 없는 비천이 우리를 에워싸는가

- 함태숙 시 ‘황룡사지를 청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