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재발견 소설가 김별아의 경주 월성을 걷는 시간
(11) 월성의 주인들

처음에는 날씨 탓을 했다. 월성과 경주 곳곳을 헤매며 느낀 쓸쓸함이랄까 공허함이 한겨울의 회색 하늘과 찬 공기 때문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희뿌옇게 번져가는 입김과 함께 퍼뜩 깨달았다. 유적지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은 피와 살을 지닌 사람의 온기가 없기 때문이다. 삶이 불공평했을지라도 죽음은 만인에게 평등할지니, 왕후장상부터 필부필부까지 모두가 시간을 따라 사라져버렸다.

1730년 남산 동쪽은 김씨 왕릉
서쪽의 것들은 박씨 왕릉으로
김씨 문중·박씨 문중 ‘대타협’

신라 왕릉 중 확실한 피장자는
태종무열왕릉·흥덕왕릉 2기 뿐
선덕여왕릉 등 5기 학계서 인정

흙으로 돌아가 버린 월성 주인들
어떤 목적이건, 무덤 파는 건 ‘끔찍’
후손으로서 ‘최소한 예의’ 지켜야

죽음의 최후 단계는 해골화(skeletonization)다. 살이 썩고 뼈만 드러나는 것이다. 송장이 완전히 해골이 되기까지 온대 기후에서는 대략 3주에서 수 년, 열대 기후에서는 거의 몇 주 내, 극지방이나 툰드라에서는 수 년 이상 걸리거나 아예 미라 상태로 보존될 수 있다고 한다.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살아있는 모두가 죽으면 썩어 해골이 된다. 해골 자체로는 성별이나 나이를 분별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 그가 숨이 붙어 있을 때 어떤 삶을 살며 기뻐하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즐거워했는지는 도무지 알아낼 방도가 없다.

남은 것은 약간의 기록, 그리고 그 행간을 파고드는 상상력뿐이다. 월성은 왕성이다. 그러니 월성의 주인은 ‘왕’이다. 지금은 텅 빈 언덕, 발굴의 현장인 월성에서 한때 살았던 ‘집주인’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56대 신라왕 중 경기도 연천에 묻힌 경순왕을 제외하면 55기의 왕릉은 경주 지역에 조영되었을 것으로 본다. 현재 확인되거나 추정되는 무덤이 36기, 나머지 19기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고 한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를 일은 조선 전기까지 전승된 신라 왕릉이 11기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원래 11기뿐이었다가 조선 후기 족보 간행과 조상 숭배 사상이 확대되면서 뒤늦게 늘어난 것이다.

1730년 경주부윤 김시형은 김씨 문중과 박씨 문중 사람들을 불러 모아 ‘대타협’을 시도한다. 명확히 알려지지 않은 능의 주인을 정하자는 것이다. 김씨와 박씨가 토론을 했는지 혈투를 벌였는지 제비뽑기를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결과 남산 동쪽에 있는 것들은 김씨 왕릉이고 서쪽의 것들은 박씨 왕릉으로 결정했다는 게다. 이때 17기의 주인공이 새로 정해지고 이후 8기가 추가 되어 오늘날에 이르렀으니…

경주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오락가락하는 동안 일부러 찾지 않아도 숱한 왕릉 혹은 왕릉으로 추정되는 무덤들과 마주쳤다. 삼릉, 내물왕릉, 원성왕릉, 신문왕릉, 선덕여왕릉, 태종무열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진지왕릉, 진흥왕릉, 법흥왕릉, 문무대왕릉 진평왕릉 등등. 하지만 왕릉에서도 왕을 만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앞서 말한 대로 신라의 왕릉 중 피장자가 확실한 것은 태종무열왕릉과 흥덕왕릉 2기뿐이고, 이러저러한 근거로 미루어 학계에서 인정하는 것은 선덕여왕릉 등 5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 파보면 안 됩니까? 다 파서 확인해보면 될 것 아닙니까?”

경주남산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유적답사에 참가했을 때 동서로 나란한 ‘삼릉’ 앞에서 누군가 해설자에게 따지듯 물었다(그 누군가는 원래의 신청자가 아니고 개인적으로 남산을 오르다가 우리 일행에 끼어 귀동냥을 하던 차였다). 아달라이사금, 신덕왕, 경명왕 등 박씨 왕 3인의 능으로 전하고는 있지만 앞서 말한 바대로 김씨와 박씨 후손 간 ‘대타협’의 결과이니 확신할 수는 없다는 해설을 들은 직후였다.

경주에서 그 같은 ‘거친 열정’을 만나는 건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모르는 게 너무 많으니 알고 싶은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집요하고 끈질기게 ‘다 파보자’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인내심 많은 남산 해설자가 끝내 한마디 퉁바리를 던졌다.

“다 파봐서 뭐 합니까?”

쪽샘 유적 44호분 발굴관에서 만난 신라문화원 해설사도 비슷한 뜻으로 말했다. 다 파봐야 알 수 있는 것이 없다고. 1921년 노서동 고분군에서 금관이 나온 이후 지금까지 모두 6개의 신라 금관이 발굴되었다.

그런데 그중 주인을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다. 땅 파는 걸 일로 하는 두더지도 먹이를 얻기 위해 파고 또 판다. 100년에 걸친 연구로도 주인 하나 제대로 밝히지 못했는데 다 파서 또 무엇을 얻어 무엇을 밝히겠는가? 언젠가 내 무덤을 만들어 줄 아들에게 속살거린다.

“내가 무덤의 주인이라면, 목적이 무엇이든 누가 내 무덤을 판다는 건 정말 끔찍할 거야!”

무덤은 망자의 집이다. 주인의 허락 없이 무덤을 열고 저세상에서 쓰리라 했던 껴묻거리까지 꺼낸다면 주거침입죄에 절도죄를 물을 만하다. 후손이 벼슬이 아니고 시간이 면죄부가 아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뒤엉킨다. 대체로 갈피를 잡지 못해 가리산지리산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취급되지만, 이런 경우엔 좀 더 오래 서성이며 헤매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숭배까지는 아닐지언정 예의는 반드시 필요하다.

월성이 실질적인 왕성으로 기능한 것이 6세기 초 지증왕 때부터라고 학계에서 추정하는 바, 56명의 왕 중에서 월성의 주인으로 살았을 몇 분을 만나보기로 했다.

대릉원의 천마총은 1973년 발굴해 1976년부터 무덤 내부를 공개해왔는데, 2016년에 40여년 만에 재정비해 2018년 7월 다시 개방했다. 무덤 안을 개방하는 경우는 간혹 있다. 나도 몇 번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모스크바의 레닌 묘는 줄이 하도 길어서 포기했고 하노이의 호치민 묘는 줄을 서서 들어갔다. 이른바 마우솔레움(mausoleum), 생전에 유명했던 사람의 장대한 묘에 방부 처리된 시신은 내 눈에 영웅이라기보다 불면증 환자처럼 보였다. 생전의 고단한 삶으로도 모자라 사후까지 잠들지 못하다니, 죽은 자의 모습을 보고픈 산 자들의 마음을 살아서도 잘 모르겠다.

리모델링한 천마총은 처음이다. 서늘하고 깊은 집을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가만히 방문한다. 천마총에는 미라가 없고 육신이 걸쳤던 관모와 허리띠 등의 장식 모형만 남아있다. 그 주인은 소지마립간 또는 지증왕으로 추정된다.

 

만약 지증왕이라면 ‘삼국유사’의 적나라한 이야기는 과장인 듯하다. 커다란 똥 덩어리의 주인인 연제부인과 혼인한 지증왕의 거대한 1자 5치의 음경은 실물이라기보다 강력한 왕권과 생산력의 상징이리라. 왕이라는 칭호와 신라라는 국호, 우경 도입과 순장 금지, 지방 제도 정비와 우산국 정벌 등등… 지증왕 시절 신라는 가장 많이 변화하고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천마가 말인지 기린인지 논쟁이 치열하지만 그 상서로운 동물을 잡아타고 훌쩍 도약하고픈 왕의 마음만은 고스란하다.

지증왕의 아들인 법흥왕의 무덤은 경주 시내를 벗어나 있다. 신경주역으로 가는 길에 찾은 법흥왕릉은 소박하고 외로운 무덤이다. 주변은 논밭이고 부러 찾아오기엔 좀 썰렁하다. 그러나 법흥왕은 신라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성품이 너그럽고 후덕해 자비의 종교인 불교를 공인한 한편 율령을 반포하고 금관가야를 병합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애공사 북쪽 봉우리”에 조영했다는 법흥왕릉이 중요한 점은, 이전까지 월성의 북쪽 평지에 조영했던 왕릉을 서천 건너편의 산록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법흥왕은 죽어서도 일하셨다. 법흥왕릉의 위치는 계획적인 고대 도시를 건설하려는 신라의 움직임을 반영한다.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으로 알려진 무덤들은 문성왕릉, 그리고 헌안왕릉과 함께 서악동에 몰려있다. 무덤 앞에 서니 쓸쓸함을 넘어 얼마간 참담했다. 전날 법흥왕릉에 갔다가 ‘철덕(철도 덕후)’이기도 한 아들이 영천의 간이역을 보자고 졸라 시계(市界)를 넘었다. 도중에 야단법석한 절이 눈에 띄어 들렀는데 사찰이라기보다 장지(葬地)였다. 그곳을 장식한 수십만 개의 번쩍거리는 불상을 보고 나니 진흥왕릉과 진지왕릉이 더 초라하게 느껴졌나 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무덤들이 특별할 수밖에 없으니, 무덤의 주인들이 졸작 ‘미실’의 중요한 등장인물이기 때문이다. 정복 군주로 살며 전륜성왕을 꿈꾸었던 진흥왕과 왕위를 빼앗기고 ‘살아있는 귀신’으로 유폐되었던 진지왕이 과연 이 작고 둥근 집에 갇힌 것인지, 삶과 죽음의 간극이란 너무도 아득하여 막막하다.

선덕여왕릉은 사천왕사지에서 낭산을 따라올라 있는데 기록과 위치가 일치하는 왕릉 중 하나다. 선덕여왕은 드라마의 유명세보다 더 유명해져야 마땅한 왕이다. 삼국시대 다른 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여왕의 존재 자체도 그러하려니와, 끝없는 도전과 저항에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맞선 선덕여왕의 지혜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중요도에 비해 무덤이 초라한 것을 법흥왕 때부터 소박해진 왕릉들을 통틀어 다르게 생각해본다. 거대한 고분으로 권위를 과시하는 대신 국고 낭비를 막고 애민(愛民)을 실천한 게다. 나라나 사람이나 자존감이 높고 자신감이 충만하면 스스로를 낮추는데 두려움이 없기 마련이니.

태종무열왕릉은 경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천교를 건너면 금세 나타난다. 시내와 가깝고 주인이 분명한 두 왕릉 중 하나라 조성사업이 한창이다. 무열왕릉 뒤로 줄지은 고분군은 김춘추의 조상들로 추측되는데, 어섯눈으로 보기에도 왕을 배출할 만한 명당이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내력을 가르치며 태종무열왕 김춘추부터 이야기했는데, 명주군왕 김주원이 무열왕의 6세손이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최초의 진골 왕이요 삼한통합의 영웅이지만 민족주의 사관을 신봉하는 이들에게 외세를 끌어들인 배신자(?)로 비판받는다. 하지만 ‘민족’이란 개념 자체가 20세기 이후 등장했다는 사실을 차치하고도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것은 어리석다.

642년 음력 8월, 지금의 경남 합천에 있던 대야성이 함락된다. 대야성주 김품석은 김춘추의 딸 고타소의 남편이었다. 성의 함락과 함께 김춘추의 딸과 사위는 죽어 유골이 백제의 감옥에 묻혔고 신라 백성 1천 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이때 김춘추가 받은 충격이 ‘삼국사기’에 생생하다.

“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는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개인의 역사와 거대 역사가 만나는 지점에는 대저 슬픔이 있다. 분노가 변화를 일으키고 고통이 새로운 꿈을 꾸게 한다. 그때의 사람들과 마음들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살았던 집은 이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흙으로 돌아가 버린 월성의 주인들, 그들의 영혼은 천오백 년을 건너뛰어 새롭게 발굴되는 생전의 집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