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이창동 감독은 과작(寡作)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1997년 ‘초록 물고기’로 데뷔했으니 20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동안 그는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버닝’을 연출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는 관객동원 면에서는 열세를 면치 못한다. 2007년 전도연이 ‘밀양’으로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덕에 160만 관객이 들었을 뿐, 여섯 편 관객이 340만이 안 된다. 자고 나면 천만 영화가 나오는 세상에 희귀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얼마 전에 윤정희가 주인공으로 나온 ‘시’(2010)를 다시 보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했다. 치매 초기 단계의 초로(初老) 여인 미자가 어린 시절 꿈이던 시 쓰기에 도전한다. 동네 문화원에서 주관하는 시 강의에 떼를 쓰다시피 해서 수강하는 미자. 강사인 김용탁 시인은 ‘시는 일상 곳곳에 있으며, 시상(詩想)을 구하려면 사물을 여러 각도에서 애정을 가지고 봐야 한다’고 말한다. 작은 공책을 들고 다니면서 시상을 찾아 헤매는 미자는 아름답다.

문제는 미자의 일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데 있다. 이창동 영화가 그렇듯 미자에 관한 정보는 전혀 넉넉지 않다. 이혼하고 홀로 부산에서 살아가는 딸이 하나 있고, 그녀 소생(所生)의 외손자를 데리고 사는 66세의 미자. 중3 종욱이는 또래 아이들과 다를 게 하나 없는 천둥벌거숭이다. 게임과 전화기와 늦잠과 짜증에 익숙한 종욱. 그런 연장선 위에서 종욱은 친구들과 함께 같은 학교 여학생을 집단 성폭행한다. 여기서부터 ‘시’는 종잡기 어려운 길을 간다.

‘시(詩)’는 문자 그대로 절집의 언어다. 절제와 은유와 깊이와 혜안(慧眼)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시 쓰는 일이 가능해진다. 빛나던 20대 청춘 호시절에 나도 시를 쓰고자 했다.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으되,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대상(對象)을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도 없었고, 깊이 있는 사유와 인식에 이르는 독서도 태부족했다. 무엇보다 시를 쓰고자 하는 욕망의 최종지점이 부재했으므로, 물러섬에 거리낌이 없었던 탓이 크리라.

시는 혁명가의 몽상과 더불어 창공 너머로 아스라이 사라져버린 꿈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시절 나는 시인들의 평전과 시집을 언제나 품고 다녔다. 그들의 시를 읽고 여러 번 고쳐 읽으면서 시를 기억하려 노력했다. 소설가 정한숙 선생은 “시는 기억하지 않으면 제맛이 안 나!” 하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래서일까?! 난 적잖은 한국시와 시조(時調)와 한시(漢詩)를 기억한다. 특이한 것은 러시아 시인들의 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아흐마토바의 ‘저녁에’와 예세닌의 ‘귀향’, 기피우스의 ‘바느질하는 여인’ 같은 시편을 즐겨 읽으면서도 오래 기억하지 못함은 무슨 연유일까?! 그렇지만 러시아 시인들이 보여주는 섬세함과 애틋함, 안타까움과 의식의 전변(轉變) 같은 것은 독자인 나를 언제나 격동(激動)시킨다. 참 잘 쓰네, 하는 찬탄이 절로 나온다. 아마도 내가 시를 쓰지 못한 결정적인 까닭은 재능이 없어서일 것이다.

영화에서 시인은 말한다. “요즘은 시가 죽어버린 시대에요. 아무도 시를 읽지 않고, 시집을 사지도 않잖아요?!” 시를 읽지도, 시집을 사지도 않는 시대에 청춘들은 무엇으로 세월과 만나는지, 언제나 그것이 궁금하다. 술도 안 먹고, 책도 읽지 않고, 시는 못 본 척하고, 시대와 역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무엇이 21세기 우리의 청춘들을 설레게 하는가! 취직인가, 성적인가, 게임인가, 영화인가, 사랑인가. 종잡을 수가 없다.

2500년 전에 중니(仲尼)는 ‘불학시 무이언’이라 설파했다.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쓸 말이 없다는 얘기다. 시를 통째로 기억해 자신의 언어로 삼았던 고대의 선비들은 그것을 길잡이 삼아 평생을 살아갔다. 곧 4월이 오면 이영도의 ‘진달래’가 시나브로 떠오를 것이다. 매화가 채 지기도 전에, 벚꽃이 아직 피기도 전에 나는 ‘진달래’를 그리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