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기형도 지음·문학과지성사 펴냄
시 전집·1만3천원

기형도 시인. /문학과지성사 제공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중략…)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중략…) ”- 기형도 시 ‘어느 푸른 저녁’부분

29세에 요절한 시인 기형도(1960∼1989)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가 활동했던 1980년대는 산업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로 넘쳐나고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존재 의의를 상실한 현대인들의 내적공허가 심각한 때였다. 기형도는 이러한 시대적 현실을 시에 담아 기존 시들의 대결구도를 넘어서 기형도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는 주로 유년의 우울한 기억이나 도시인들의 힘든 삶을 담은 독창적이면서 개성이 강한 시들을 발표했는데 상실이나 죽음과 관련한 작품은 현실을 정확하게 묘사했다. 이러한 기형도의 시는 젊은 독자층의 공감을 사기에 충분했으며 쉬운 언어로 표현했지만 깊이가 있어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깊은 울림을 줬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는 기형도(1960∼1989) 시인의 30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시들을 오롯이 묶은 기형도 시 ‘전집(全集)’이다. 그의 첫 시집이자 유고 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1989)에 실린 시들과 미발표 시들 97편 전편을 모으고,‘거리의 상상력’을 주제로 목차를 새롭게 구성한 책이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는 ‘정거장에서의 충고’와 함께 생전의 시인이 첫 시집의 제목으로 염두에 뒀던 것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여전한 길 위의 상상력으로 해를 거듭할수록 두터워지는 기형도 시의 비밀스런 매력이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그의 시를 찾고 또 새롭게 읽기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이유일 것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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