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섭 변호사
박준섭
변호사

필자의 어린 시절 도서관은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때는 새벽부터 줄을 서야 도서관 자리를 겨우 얻을 수 있는 시절이었다. 칸막이가 있는 책상의 작은 공간에서 모두들 수험서를 펴고 공부하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빌 게이츠의 말을 빌자면, 적어도 어린 시절 나를 키운 마을 도서관은 시립도서관이 아니라 책으로 가득 찬 캐비닛 몇 개를 가지고 있던 교회였다. 나중에 대학의 도서관 열람실에서 공부를 하면서 법서를 읽었고, 신학책, 철학책과 역사책도 읽었다. 도서관의 오픈된 서가에서 읽던, 아니 읽고 싶던 책들은 ‘세상을 향해 열린 나만의 창’이 되어 주었다.

최근 몇 십년 동안에 공공도서관은 전통적인 도서관 개념에서 탈피하여 현대적으로 변화되었다. 영국은 18∼19세기 근대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근대국가 건설에 필요한 지식과 도덕성을 갖춘 국민형성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공공 도서관을 설립을 계획하고 1850년 세계최초로 공공도서관법을 제정했다. 이후로 공공도서관은 백과사전적 ‘지식의 공간’과 ‘정보와 지식의 접근’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민주주의 의사결정에 참여를 할 수 있는 근대적 시민형성을 뒷받침하는 계몽주의적 공공성에 가장 중요한 시설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공공 도서관의 근대적 이념은 다원화된 현대사회에 이르자 시민들의 다양한 욕구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실제로 영국 등 유럽에서도 1990년대 이후 도서관 이용율 감소가 사회문제로 대두되어 새로운 도서관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것은 공공 도서관을 일상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는 매력적인 디자인 공간을 통해서 생활밀착형 소통과 공유를 촉발하는 지역 커뮤니티의 거점시설로 바꾸는 것이다.

이제 도서관은 책을 읽는 곳일 뿐만 아니라 광장이기도 하고, 거실이자 발코니이기도 하여야 한다.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며, 음악 카페이기도 하고 전시장이기도 하고 소통의 장도 되어야 한다. 바로 복합문화공간이 되어야 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공공이론가인 켄 워폴(Ken Worpole)은 바람직한 공공도서관의 모습을 ‘도시의 거실’에 비유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도 이미 바뀌고는 있지만 공공 도서관의 정책을 이제 더 적극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우선 수준높은 공공디자인을 감각을 가지고 도서관 건축을 하여 ‘와우(WOW) 효과’를 높여야 한다. 공공건물인 도서관을 지으면서 건축 디자인적으로 뛰어나게, 책상과 책장 등 비품을 고급스럽게 갖추고 예술품을 전시하는 것에 드는 비용을 아까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시민들뿐만 아니라 특히 가난한 어린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디자인감각과 예술적 감각을 배우고, 수준 놓은 문화를 누리면서 자랄 수 있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자비로 얼마든지 좋은 곳에서 좋은 것을 배우고 누릴 수 있지만 가난한 아이들은 그런 경험을 얻기가 어렵다. 그러니 복합문화공간인 공공 도서관에 머무르면서 자연스럽게 수준이 높아지도록 해야 한다.

또 공공 도서관 건축이 바로 사회·문화적 도시재생과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 도서관 자체로도 카페, 레스토랑, 상점 등의 일상과 연결되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침묵의 원칙이 지배하는 경건하고 규범적인 공간이 아니라 먹고, 떠들고, 놀며 지식과 경험을 소통하고 교환하는 지식의 시장이 되어야 한다. 뿐만아니라 도서관과 주변의 시장, 광장, 아파트, 상가 등과 연속적 연결성이 아우러 지도록 해서 도서관이 ‘지붕덮힌 열린 공간’이 되어야 한다.

대구에 대표도서관이 새롭게 지어진다. 세련되게 디자인된 새 도시의 거실에서 시민들과 아이들이 최고 수준의 문화와 예술을 즐기고 교육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